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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r 07. 2023

감정의 언어화

일기를 사랑했던 아이

부부 싸움 중에 남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하단다.


남편은 논리적인 듯 보이나 강압적이고,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의 의견을 관철하다 논쟁이 계속되면 고장이 난다. 특히 식당 따위의 하찮은 질문 아니고는 나에게 의견을 물어볼 생각이 없다.


5년 이상 살다 보니 이유가 짐작은 간다. 나도 그렇지만 남편은 훨씬 강압적인 시아버지 밑에서 전혀 공감을 받지 못했으며, 바른 결정을 내리고, 의견을 논리적으로 개진하길 강요받았다. 거기다 더해 학습적 성과가 높은 시부가 귀찮은 걸 싫어하는 시모의 의견은 묻지 않고 본인이 해결하셨을 것 같다.


나도 부모에게 공감의 언어를 들어본 기억은 없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질문과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고, 부모에게는 거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해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서 동네 끝까지 가보고, 닫힌 문 뒤에는 뭐가 있냐는 질문을 던지는 시를 쓰던 아이는 휘발되어 사라졌지만 하나 남은 것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쓰던 일기를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썼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던 나에게 일기는 무덤덤한 가족들 사이에서 내 감정을 쏟아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육아서를 읽다 보니 저자가 감정의 언어화를 강조하는 챕터가 있었다. 요즘은 워낙 아이의 감정 인정과 공감 표현을 중요시 여기는 시대라 나도 분투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부부에게 대입할 생각은 못해봤다. 똑같이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나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꾸준히 일기에 쓰면서 나의 감정을 언어로 풀어놨지만 남편은 그럴 기회가 없었고, 지금도 자기의 감정도 모르겠고, 표현도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화가 잘 안 되고, 자꾸 싸움이 되었구나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물론 은연중에 보고 배운 대로 아내를 무시하고, 싸우면 주전부리나 선물 따위로 풀려고 해서 나를 화나게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남편이 원해서 시작되진 않았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다르 듯 개별 가정 문화도 참 다양한 모습일 것이다. 그 안에서 20년을 속해 자라고, 배워온 것이 본인의 삶이라도 모두 본인의 탓은 아니다.


나도 우는 아이를 보면 부아가 먼저 치밀지만 오은영 박사의 말에 따르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아이에게 공감의 언어를 건네려고 노력한다. 남편도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을 수 있다.


오늘도 이렇게 남편을 이해하고,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노력한다. 어제 출근길에 한강을 가고 싶었어도 오늘은 다시 어떻게든 너를 이해해 보려고 이렇게 몸무림 치는 나를 너는 절대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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