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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Jan 13. 2023

술 헤는 밤

한 잔 하는 낙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난 술을 참 좋아한다. 정도만 걷는 성격 탓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음주를 시작했지만 자취할 때도 혼자 마실 정도의 맥주캔과 소주병이 항상 냉장고에 구비되어 있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술은 나와 함께하는 가장 좋은 친구였다. 빙글빙글 들뜬 기분으로 잠들면 혼자 사는 외로움과 막연한 무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전까진 평범한 애주가였다면, 의존하다 못해 술 없인 못 자는 날도 찾아왔다.


예민하지만 잠이 많았던 터라 설레어도, 무서워도, 그 어떤 일을 앞두고도 못 자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불면증이 올 거라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참 별 것 아닌 일에 잠 못 들기 시작했다.


"승진"


이 얼마나 우스운가. 고작 승진이라니. 아무리 하루의 1/3을 회사에서 보낸다고는 하지만 나는 내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일만 잘하면 되지, 승진 따위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슬프게도 아니었다. 나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지금도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승진 못해서 잠 못 들던 과거를 가진 그냥 그 정도인 회사원.


표면적으로 촉발제는 승진 문제였다. 내면에는 10년이 넘는 회사 생활에서 처음 맞닥뜨린 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사실 뭐, 승진이라는 게 얼마나 인사권자의 주관적인 결정인가. 그래도 머리로 하는 이해와 뜨거운 감성은 철저히 별개인지라 그 시절에는 참 괴롭게 느껴졌다. 순진하게도 10년의 회사 생활을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싫어도 휑한 회의실에서 왜 그 사람이 승진했는지에 대해 열변의 토하던 실장의 얼굴이 자동으로 함께 소환된다.


승진에서 누락된 시절, 나는 복직 후 한창 프로 혼술러가 된 때였다. 육아의 고단함을 덜기 위해 아이를 재운 후 술 한 잔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힘들어서 마시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안 좋아지면서 더 괴로워지고, 취해서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날들을 보내던 와중에 승진 탈락이 찾아왔고, 술을 안 마시면 아예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새벽 출근 탓에 아이를 재우면서 같이 잠드는 일이 많았는데 아이가 잠들어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 겪는 불면증이었다. 잠이 오지 않자 잡념만 가득 몰아 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만 떠올랐다. 사실 난 온실 속 화초처럼 실패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아왔구나, 그래서 지금 더 괴롭구나. 평생 남일이라고 생각해 온 알코올중독의 길은 사실 참 들어서기 쉬웠다.


3개월쯤 지나자 괴로움은 잦아들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반강제로 망각되었다. 다만 가장 좋은 친구, 술과는 슬프게도 갈라서고 말았다. 더 이상 술을 마시고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술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기분은 처졌고, 술과 미련 남은 연인처럼 구는 사이 술의 빈자리에는 항우울제가 치고 들어왔다. 의사는 우울증과 술은 상극이니 절대 금주하라고 병원 문 앞까지 따라오며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항우울제는 먹자마다 잠드는 최고의 수면제였다.


정신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약 먹고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날들을 매듭 짓고, 제대로 출퇴근 하고, 많이 큰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오니 또 옛 친구가 생각나네? 다시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겠니? 너만큼 날 위로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아직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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