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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실 Sep 15. 2023

살림에 대하여

집을 꾸미는 것, 그리고 집안일을 한다는 것

호텔 로비에서 방을 배정받고 올라와 룸카드를 문에 댄다.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주름 하나 지지 않은 하얗고 무거운 거위털 이불이 높은 매트 위에 깔려 있고, 각종 어메니티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헤어드라이어는 벨벳 재질의 작은 주머니에 전선이 돌돌 말린 채로 들어 있다. 커피 포트의 전선도 둘둘 말아 정돈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각종 커피와 티백들이 상자에 담겨 있다. 와인잔 위에는 도일리처럼 생긴 동그란 종이 뚜껑이 덮여 있다. 직원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청소하고 정리했을 이 호텔방은 방문객에게 대접받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산뜻한 호텔방의 문을 여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해 준 살림이 이렇게 좋은 것이다. 모델하우스가 깔끔한 이유도 애초에 그곳은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이 발생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호텔과 모델하우스 둘 다 '살림'이라는 의무가 생략된 곳이다.


집을 꾸미다 보면 살림을 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다. 예쁜 옷을 사서 이것저것 매치해 보고 패션 트렌드를 즐기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 빨래와 옷가지 정리를 하지 않고는 옷을 취미로 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일단 집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 위에 무엇을 덧붙이건 집이 빛나 보이기는 어렵다. 집을 꾸미기 위해 가구를 사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가구에 내려앉는 먼지를 터는 일은 주기적으로 해 줘야 한다. 어째 집을 꾸민다는 행위는 사실상 청소를 비롯한 살림행위가 대부분을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집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살림 박사가 되어 있다.



살림을 피하지 못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살림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신선한 과일과 농산물을 구매하는 것이 마냥 재미있는 사람도 있고, 직접 레몬소독수를 만들어서 집 안 구석구석 닦는 것이 가슴 뻥 뚫리게 시원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소재와 성능이 좋고 예쁜 주방도구와 그릇을 구경하는 일, 요리하는 일을 즐기고 있다. 어째 살림이라기보다는 약간 쇼핑에 가깝기도 하지만 말이다. 또 칫솔, 휴지, 샴푸를 비롯한 생활용품의 재고를 관리하는 것도 즐겁다. 팬트리에 필요한 물건이 채워져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전업 주부들의 애환은 한 일이 티가 안 나는 것이라고 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품도 많이 드는 반면, 남이 알아봐 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밥하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기. 요리를 하려면 식자재를 사러 마트에도 다녀와야 하고, 쟁여둔 요리재료의 유통기한과 상태 관리, 그리고 그 재료들을 조합해서 어떤 레시피를 쓰면 좋을지 계획도 세워야 한다. 빨래하고 옷 개어 넣기. 계절이 바뀌면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고 옷정리하기. 가끔 가다 이불을 일광건조하기도 해야 한다. 매일매일 해야 하는 청소. 청소 중에서도 화장실 청소는 조금 까다롭다. 정돈은 매일이 아니라 매 순간 해야 한다. 그때그때 사용한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샴푸, 생수, 화장품 등 생활용품의 재고관리.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환기를 하고 가끔씩 먼지 떨기. 벌레 잡기.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살아왔다는 게 신기하다. 문득 자신이 대견해지는 대목이다.




청결을 유지하는 일


살림의 종류를 나눠보니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깔끔하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말 그대로 먹고사는 일, 이 두 가지로 말이다. 그중에서도 청결을 유지하는 일, 청소와 정리정돈은 인기가 없는 편에 속한다. 먹지 않으면 당장 배가 고프고, 먹은 자리를 치우지 않으면 다음 요리를 못 하지만, 집 치우는 일이야 조금 게을리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찮아도 마음먹고 싹 청소를 하거나 정돈을 끝내면 굉장히 뿌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갓지다'라는 표현이 있다. 국어사전 상에는 한가하고 조용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나오는데, 실제 쓰임새는 이와는 아주 살짝 다르다. 책상이 어지러워 공부에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면, 한갓지게 정리부터 하고 깔끔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다. 식당에서 여섯 명이서 4인석에 앉는 것보다 두 개의 테이블에 세 명씩 나누어 앉는다면, 좀 더 한갓지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 두 개 있을 때, 둘 다 싸안고 고민하지 말고,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한 뒤 천천히 다음 문제를 고민하면 좀 더 한갓지게 생각을 할 수 있다. 즉, 속이 시원하고 신경 쓸 일이 없으며 후련할 때 한갓지다고 하는 것이다. 청소를 하고 나서의 그 시원하고 한갓진 기분을 아는가.



그런데 집을 청결하게 하는 일 중에서도 청소와 정돈은 좀 다르다. 누군가에겐 이 둘이 비슷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엄연히 다른 성격의 일이다. 잠 재미있다. 청소는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고, 책상에 있는 얼룩을 지우며 싱크대에 낀 물때를 제거하는 일이다. 정리정돈은 물건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가재도구는 부엌에, 생활용품은 팬트리나 베란다에 둔다. 화장품도 손이 자주 가거나 크기가 작은 림밤과 같은 것은 화장대의 앞 쪽에, 상대적으로 뜸하게 쓰거나 대용량인 것은 뒤쪽에 배치한다. 콘센트의 위치를 고려해서 적재적소에 조명을 둔다.


나는 청소보다는 정리에 가진 강박이 커서 그런지, 말끔하게 청소를 하는 것보다 적절하게 정리를 끝냈을 때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서재 한 면에 책장을 메울 정도로 책이 많은데, 그 책을 주제별, 연대순에 맞게 정리하는 것은 신경 쓰지만 책등에 먼지가 내려앉는 것은 상대적으로 신경 쓰지 않는다. 먼지야 언제든 털 수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상태는 혼돈의 카오스처럼 와닿기 때문이다. 집에 두 명이 살고 있는데 한 명은 청소를, 한 명은 정리를 좋아한다면 그 둘은 아마 최고의 조합이 될 것이다.




나를 먹여 살리는 일


두 번째 집안일의 종류로 요리를 비롯한 그 외의 일들이 있다.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운전을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이야 원하는 곳으로 차를 끌고 떠날 수 있지만, 운전을 하지 못하던 시절의 나는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이 많았다. 산자락에서 내려다보이는 영남 알프스의 뻥 뚫린 풍경을 보고 감탄만 나올 뿐, 차를 끌지 못하니 눈앞의 떡일 뿐이었다.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곳에서 거주하던 때,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같이 갈 수 있는 곳은 그저 시내의 카페 몇몇 뿐이었다. 수 km 밖에는 천혜의 자연이 펼쳐져 있는데도 말이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엄마는 한밤중 아이에게 고열이 나면 발을 동동 구르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운전을 못 하다가도 전업주부가 되면 운전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다. 기동력이 없는 상태는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이것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이다. 능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요리를 하지 못해도 답답할 때가 있다. 집에 부모님이 주신 농산물은 있는데 어떤 모양으로 잘라서 볶고 지져야 할지 통 감이 오지 않는다. 불의 세기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오전을 보냈는데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점심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이다. 다른 사람이 한 요리를 구하는 것이다. 요리를 아주 좋아하는 룸메이트가 없는 이상, 밖에 나가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집 근처의 밥집은 웬만한 곳은 다 가 보아서 다른 게 먹고 싶다. 먼 거리의 식당에서 주문을 하자니 배달 팁도 만만치 않고 음식도 많이 남을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집에서 대충 닭가슴살에 아보카도, 토마토를 싼 토르티야롤을 먹고 싶다. 한 번 만들어나 볼까…?



처음 요리를 해서 먹을 만한 한 상을 차렸을 때 그 감정은 처음 고속도로를 탔을 때와 비슷하다. 드디어 내 몸을 먹여 살리는 일을 혼자서 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서 한층 더 나아가는 것이다. 흙 묻은 재료에서부터 다듬어 내 입에 들어갈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을 때, 비로소 자급자족을 한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뿌듯함과 안도감을 선사한다. 몇 달간 해 먹은 음식 사진을 주욱 한 번 다시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소중한 나 자신, 골고루 영양가 있게 먹였구나, 잘했다.




세상 귀찮은 일이 집안일이지만 요새는 소위 말하는 이모님 세트가 많다. 가장 최근의 이모님 3 대장으로는 빨래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 청소기가 있다. 살림을 도와주는 가전제품은 앞으로 더 개선되고 종류도 많아져 미래의 이모님 3 대장은 또 다른 제품이 될지로 모른다. 살림은 귀찮지만 뿌듯함을 주고, 정리된 집은 생산성을 향상해 주기도 한다. 깔끔하게 청소한 집, 물건들이 제자리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집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하루를 더 알차게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집을 꾸미다 보면 살림을 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다. 살림을 하지 않고 깔끔한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이거나 저 멀리 도비가 살고 있는 마법세계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잘 꾸며진 집 안에는 꼭 살림박사가 한 명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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