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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실 Aug 28. 2023

집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집은 물리적 형태를 한 인생의 퇴적물이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는 유행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체감상  패션의 순환 주기가 6개월보다는 길다고 느끼지만, 확실한 것은 해마다 주목을 받는 아이템은 바뀌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요즈음 K-pop으로 통칭되는 대중가요의 유행은 그보다 호흡이 빨라서, 아무리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다고 하더라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우리는 새로 발매된 다른 음원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이런 유행은 집에서도 다르지 않다. 다만 트렌드가 바뀌는 속도가 조금 더 느릴 뿐이다. 10년 전 2010년대에는 북유럽 인테리어, 스칸디나비안식 스타일이 대유행을 했었다. 당시 인테리어를 한 대부분의 집이 화이트&우드 컨셉이었던 것 같다. 노르딕(Nordic)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고, 헌팅 트로피 소품으로 벽장식을 한 집들도 많았다.


그 뒤로는 미니멀리즘과 온통 새하얀 인테리어가 유행했다. 그즈음 작가이자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Marie Kondo)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플랜테리어(Planterior)가 주목을 받았고,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집 안에서 식물 키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초록을 집 꾸미기의 주요 소재로 한 집이 많아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미드센츄리모던 가구를 활용한 거실 ⓒSam Frost, Michael Reynolds on Architectural Digest


그리고 가장 최근의 유행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미드센츄리모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미드센추리 모던(Mid-century Modern)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의 인테리어, 건축, 제품 디자인에서 유행한 스타일이다. 이 시기는 오랜 전쟁 탓에 물자와 자원이 부족하던 시기여서, 이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금속, 강철, 유리, 폐기된 군용 원단 등을 적절히 활용해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 또한 재료의 활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간결한 디자인의 물건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미드센츄리모던 스타일의 인테리어 역시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특히 더 주목을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의 유행이 하나 더 있다. 지엽적인 부분이지만 요새 턴키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대부분의 집에서 가벽과 아치형 개방문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 듯하다.




인테리어에도 트렌드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의 모양새가 시간을 두고 다른 컨셉을 한다는 것이.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유행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쉬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예쁜 집이 단 한순간에 내 집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불리1803 창업자 부부의 집 ⓒVOGUE KOREA


집은 물리적 형태를 한 인생의 퇴적물이다. 퇴적되어 쌓이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집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더 반영하고, 그를 드러내며, 그에게 맞도록 최적화되고 진화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쓰시던 경첩 거울이 놓인 오래된 화장대,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 친구들이 써 준 엽서가 붙여진 벽, 소장가치가 있는 책들만 남겨둔 책장, 이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의 인생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런 집에는 단순히 '인테리어'가 잘 되었다는 표현를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든다. 누군가의 잘 꾸며진 - 엄밀히 말하면 잘 꾸며진 것으로 보이는 - 집은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이 한순간에 예뻐지기를 기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책장이 한순간에 다 차 있기를 원해서 본인이 읽은 적 없는, 어쩌면 평생 읽을 계획이 없는 책들을 대량으로 구입해 진열해 둘 것이다. 벽에 선반을 달고 싶어서 막상 선반을 달아두니 그 공간이 허전해 보인다는 이유로 소품샵에서 예뻐 보이는 소품들을 이것저것 구입해서 선반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 선반 위의 소품은 그에게 시각적 자극 외에 어떤 의미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인테리어 잡지에서 소개하는 집들에는 유독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의 집이 많은 것 같다. 집이 그 사람의 취향과, 삶의 흔적담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이러한 이 한 번에 내 집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과도 같다. 이들은 턴키 인테리어 공사기간 몇 개월과 몇 주간의 쇼핑 기간 안에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몇십 년 된 노부부의 집을 그대로 옮겨 오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집에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는다. 그런 집은 시간이 생략된 집이고, 취향이 존재하지 않는 집이며, 그저 원본의 복제판일 뿐인 것이다.




집이 '집'이 되는 시간


우리는 조금 호흡을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 집이 더 포근해지는 시간, 나만의 공간이 되는 시간에는 어느 정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식탁이 생길 때까지 캠핑용 접이식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 드는 침대가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원룸에서 쓰던 매트리스 하나만 깔고 몇 달 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런 인내심이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즉 내 집이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는 사람,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집이 아닌, 다른 영역에 더 큰 중요도를 메기고 그 영역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야 아무 식탁이든 빨리 구매해서 편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 좋지, 구태여 인내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 역시 그랬다. 급하게 채우려고 한 집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집은 천천히 한 사람의 인생이 전개되는 속도만큼의 빠르기로 꾸며졌을 때 만족감을 주었다. 5년 전쯤 마크라메에 한참 빠져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가장 아끼는 작품은 첫 작품인 대형 드림캐쳐이다. 타워형 선풍기 커버를 만드려던 것이 어쩌다 보니 드림캐쳐의 모양이 되어버렸는데, 그 뒤로 이사를 갈 때마다 이 작품을 집 안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항상 함께 하는 마크라메 작품과 오래도록 키운 식물들, 그리고 역시나 오랜 시간 고민한 뒤 구매했던 우드 수납장이 있는 풍경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여행을 좋아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뒤 나만의 방이 생겼는데, 그 뒤부터는 여행을 갈 때 가끔씩 작은 소품이나 엽서를 구매하는 편이다. 내 서랍장 위의 공간, 그리고 그 주변의 벽은 어느 순간부터 여행지의 추억을 압축해 둔 작은 전시장이 되었다.


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 조용히 같이 변화하고 있다면 '완성'된 상태라는 것이 있을까. 물론 사람마다 머물고 싶은 집의 특성과 미적 기준이 다르고, 취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완성된 집이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집은 존재할 것이다. 그런 집 안에서 하루라도 더 빨리 생활하고 싶은 마음 누군들 없겠느냐만은, 급하게 완성하려 한 집은 매력이 없다. 소위 말해서 '급조'한 집과 가구, 그 안의 사물들에는 시간과 경험, 사유가 녹아 있지 않다. 나에게 쓰임이 있는 물건, 나의 신체를 알맞게 감싸는 의자, 본인의 취향과 너무나도 잘 맞는 작품이 담긴 액자, 친구와의 추억과 사연이 묻어 있는 물건들은 일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쌓아가며 만드는 집은 그 집만의 분위기가 생긴다. 그게 바로 정말 '내 집'인 것이다.




덧붙여서. 유행하는 인테리어, 그리고 다른 환경의 집 꾸미기 방식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글의 서두에서 북유럽식 인테리어 > 미니멀 인테리어 > 미드센츄리모던에 이르는 최근의 집 꾸미기 트렌드를 짧게 훑었다. 그리고 다음 문단에서 집은 한 사람의 취향과 인생이 쌓인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집과 건축양식은 나아가 그 안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개인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형태의 사회경제적, 기후적 여건들을 반영한다. 라탄과 같이 통풍이 잘 되는 소재를 많이 활용한 동남아 지역의 휴양지 인테리어와 북유럽의 벽난로는 기후 여건의 양 극단을 보여준다. 이제는 굉장히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유럽의 세로로 길쭉한 창문은 그 모양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창문의 가로길이에 비례해 세금을 매기는 당시의 조세제도 때문이었다. 2)


혹시 이 말이 유행하는 인테리어 트렌드를 따르는 것, 그리고 다른 국가·다른 기후환경의 인테리어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모두 나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봐 추가적으로 덧붙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다른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것, 집단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거부할 필요도 없다. 즉, 유행하는 인테리어 트렌드에 따라 충분히 집을 꾸밀 수 있다.


인간은 또한 끊임없이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므로, 나와 다른 세계의 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온돌과 구들장에서 발전한 난방 시스템을 갖춘 한국의 아파트에 살더라도 벽난로를 거실의 중앙에 설치할 수도 있고, 라디에이터를 사용하고 싶을 수도 있다. 덴마크의 유서 깊은 식기 브랜드의 파란 그림장식도 사실은 약 250년 전 동양의 도자기 위에 그려진 청색 장식을 따라 하다가 나온 것이 아닌가.


문제는 '시간'과 '개인의 취향에 대한 탐색 여부'에 있다.

개인의 취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집을 빨리 완성하고 싶어서, 집을 완성한 뒤 집들이를 하고 싶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탐색 없이, 또는 나에게 소중한 가구와 물건을 찾아나가는 축적의 시간 없이 단기간에 빨리 완성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완성된 집은 누군가의 눈에 완성된 것으로 보일 뿐이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이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는 집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예쁜 집을 찾아나설 것이다.



1)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이 뭐기에 (여성동아 백민정, 2022.4.16.) / https://woman.donga.com/life/3/02/12/3299917/1

2) 유럽은 조적식으로 건물을 올렸으므로, 대들보를 활용한 우리나라와 같은 건축물과 달리 넓은 창을 내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웠다. 이에, 넓은 창문을 가진다는 것은 실현이 어려운 건축기술을 적용했다는 것이고, 그 집의 소유자가 부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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