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짝사랑(1)
오래된 추억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가는 모래알들처럼 애써 받쳐내보려 해도 속절없이 흩어지고 만다. 차마 붙잡지 못한 시간들을 떠올릴 때면, 몇몇 조각이 분실된 퍼즐을 맞이할 때처럼, 필연적 미완성에 대한 씁쓸한 한숨을 재차 몰아 쉬면서도 일단은 열심히 맞추어 나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 시간의 조각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하고, 영화나 책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여행을 하는 등 각자의 방법을 찾는다. 나는 그녀를 짝사랑했던 10년을 간직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때늦은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기에 여념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녀와 나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가슴 설레는 운명 같은 건 아니었고 학교 규정이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기형적인 규정이 강요한, 그녀를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운명 같은 모호한 개념보다 내 인생에 더욱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무렵 나는 마음 깊은 곳까지 얼어붙어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던 아이였다. 한창 활기를 띠어야 할 나이에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당시의 나는 나이에 비해 세상에 대한 시선이 쓸데없이 조숙했던 반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더없이 미숙했다. 조숙하다는 말을 다소 볼품없이 해석하자면 눈치가 빤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능력을 갖게 된 건 여러모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부모 덕분이었다. 구구절절 풀어놓기엔 우울하고 지겨운 사연이라 간단하게만 언급하자면, 엄격하고 강압적인 아버지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어머니, 그리고 끊이지 않던 가정의 불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고등학교 진학 즈음 부모의 불화는 극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나는 특목고 진학에 실패해 아버지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큰 실망감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의욕이 부족했던 난 극도로 무기력해졌고,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에 이끌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 생활이 기본인 시골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렇게 유배라도 가듯 입학한 고등학교는 당시는 흔치 않던 남녀 합반에 3년 동안 같은 반, 전원 기숙사 생활이라는 소년만화에나 나올법한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 난 이 학교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식적으로 보이는 학급 친구들, 무책임해 보이는 선생님들, 고압적으로 보이는 선배들, 시골의 적막한 분위기, 불결하게 느껴지는 공동생활. 그들이 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다. 사람이나 환경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 주관은 평가자의 상황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고, 그만큼 나는 삐딱했고 불안했다. 눈치만 빤한 애늙은이로 자라면서 세상 많은 것들에 신뢰와 기대감과 의욕을 잃었으며, 그것들을 그렇게도 미숙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태도가 그러하니 공동생활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유 없이 동급생들에게 환멸을 느꼈고 그런 태도는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문제임을 알고 있었지만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현실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불안정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날마다 스스로를 구석에 몰아넣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입학 한 달 만에 자퇴를 고민했던 것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었다. 맞설 의욕과 용기가 없으니 도망칠 생각만 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것을 찾아 나서고 싶지도 않았으며, 있더라도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실패가 두려웠고, 실패하느니 그냥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겼다. 지금은 그런 태도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지만, 그때는 그런 엉터리 자기 합리화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혼란과 불안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그녀를 발견했다. 같은 반이었는데도 입학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평소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던 탓이다. 쌀쌀했던 3월 초의 날씨 때문인지 부적응자의 우울감 때문인지, 교실 안의 공기가 더없이 무겁고 차갑게 느껴지던 어느 날, 교실 저 멀리 맨 앞줄에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내 기분과는 정반대로 유난히 따뜻해 보이는 햇살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고, 흡사 그녀에게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과 같이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단순히 그녀의 외모에 반한 것은 사실이나 애써 변명하자면 사람의 성격이나 성품은 어느 정도 외모에 드러나는 법이다. 물론 그 시절 그런 걸 알만한 경험은 부족했겠지만 내게는 없는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지켜본 그녀는 강렬했던 첫인상에서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사려 깊었으며 티 없이 해맑고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향 같은 존재라 여기게 될 정도로 난 그녀의 성품에 감복했다. 그러니 그녀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마법에 빠진 듯 학교와 기숙사가 점점 좋아졌고, 자퇴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으며 동급생들과도 친해지기 시작했다. 가정의 불화는 여전했으나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여기게 되었고, 모나고 유별났던 성격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녀와 사귀고 싶다거나 는 고백을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고백을 했다가 다시 바라보지 못할 위험을 감내하기에 그녀는 내게 너무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어린 시절 흔히 경험하곤 했던 이성을 향한 단순한 관심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고, 이미 그때부터 그녀를 오래도록 혼자서 좋아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난 첫사랑이자 10년간 이어질 짝사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