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10년의 짝사랑(2)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여자아이? 중학교 시절 동경했던 국어 선생님? 처음으로 사귀었던 상대? 애초에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첫사랑 역시 명쾌하게 정의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내게 첫사랑은 처음으로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이다.
이 학교에서는 입학과 동시에 선후배 간 마니또 놀이를 했다. 제비 뽑기로 짝지어진 선후배는 졸업할 때까지 서로를 챙겨주는 것이다. 마니또는 본래 비밀친구를 뜻하지만 그곳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모두 알고 시작했다. 집을 떠나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서로 기댈 곳이 필요했으리라.
나는 내 마니또보다 그녀의 마니또가 더 궁금했다.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겉늙었던 그 남자 선배는 교내 밴드 동아리에서 기타를 쳤다. 그 모습이 꽤나 멋져 보였고, 후배들에게 자상하고 온화하기까지 하여 호감이 갔다. 그 선배와 친해지면 그녀와도 친해질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별다른 노력 없이 선배와 친해질 수 있었다. 선배는 날 자기 방으로 불러 먹을 걸 챙겨 주거나, 한참을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선배와는 종종 그녀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러고 있자니 교실에서는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있던 주제에 그녀와 꽤나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감격스럽게도 그런 착각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선배와 친하게 지내고 있던 내게 친밀감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외모만큼이나 평온하고 차분했다. 여자아이 치고는 낮은 톤과 부드러운 음색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그 따스함이 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내는 것만 같았다. 이후 우리는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물론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선배와 가깝다는 것이 둘의 공통점이었으니까.
일이 이상하게 잘 풀릴 때는 언제나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어느 날 선배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으며 본인의 친한 친구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어 걱정이라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 눈에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웠다면 다른 남자들에게도 당연히 그럴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순간 기분 나쁜 생각이 떠올랐다. 선배가 나와 친하게 지낸 것이 그녀 때문이었고 내가 의도치 않게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나와 친하게 지낸 그녀도 혹시? 심지어 그 둘은 마니또라는 운명이 지어준 짝이 아닌가. 며칠이 지나고 그녀와 선배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이후 난 자연스럽게 두 사람 모두와 멀어졌다. 그들이 목적을 이루어서 내게서 멀어진 건지, 내가 그들의 모습을 참을 수 없어 스스로 멀어진 건지, 둘 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후 그녀가 내 세상에 비추던 따스하고 밝은 빛은 짙은 그림자를 함께 만들었고, 나는 상황에 따라 양지와 음지를 오갔다. 그림자 안에 있을 때면 더없이 쓸쓸하고 외롭고 먹먹했다.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난한 합리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에 설사 다른 짝이 있더라도 나 혼자서 좋아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러므로 나는 비참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물론 그런 합리화가 필요했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방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