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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Sep 12. 2024

그녀의 손을 잡았다.

10년의 짝사랑(3)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기억에 종속된 시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모두 그랬다. 강한 중력장 안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듯, 그녀라는 압도적인 존재는 내 시공간을 완전히 왜곡시켰고 그 안에서의 시간들은 그렇게 영원으로 남았다. 반면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들은 몇 년의 세월이라도 무의미하게 흘러 잊혀지곤 했다. 이런 상대성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짝사랑은 기쁨보다 슬픔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물론 그렇기에 몇 안 되는 기쁜 기억은 더없이 소중하고, 그만큼 더 강렬하게 남기 마련이다. 


봄이 만연한 어느날, 국사 선생님이 주말에 근처로 답사를 갈 학생이 있는지 조사했다. 진성 이과생이었던 나는 당연히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나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대부분의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다들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티나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빛나는 눈빛으로 통통하고 귀여운 손을 번쩍들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손도 들려 있었다. 


주말이 왔고, 우리는 선생님 차에 타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다. 어디를 가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거의 기억 나지 않는다. 내 옆에서 해맑은 표정으로 이것저것 질문하며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그녀의 모습만 선명하다. 어느덧 해가 지평선에 가까워지며 유난히 노랗고 따스한 빛을 내고 있을 때, 우리는 저수지 둑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둑길에 올라서는 계단이 무척이나 가팔랐기에 먼저 올라서서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올라서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장이 요동치고 시선이 흔들렸다. 그날의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손은 사랑에 빠진 내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는 무심하게 손을 놓아 버렸다. 그제서야 둑 너머 찬란하게 빛나는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분 좋게 부는 포근한 봄바람이 잔잔한 물결을 만들었고, 그 파동이 따스한 저녁 햇살을 산산조각 내어 세상을 향해 흩뿌렸다. 별처럼 반짝이는 황금빛 윤슬을 배경으로 그녀가 바람에 날리는 고운 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서 있는 모습은 숨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따스했던 공기, 부드러운 바람, 설레는 마음, 그녀의 향기, 부드러운 손, 햇빛이 찬란하게 부서지던 수면, 그 모든 것은 뇌리에 깊이 새겨졌고 이후로 길고 긴 짝사랑의 안식처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이 때의 기억이 반사적으로 떠오르며 짝사랑에 지쳐 좌절할 때마다 내 마음을 녹여 주곤 했던 것이다. 그때 둑길 위에서 시간이 멈추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야속한 태양은 지평선 너머에 기다리는 것이라도 있는듯 빠르게 떨어졌다. 눈부셨던 윤슬은 아름다운 만큼 금방 사라지고 마는 반딧불이들 처럼 모습을 감췄고 저수지 수면은 점점 더 어두운 색을 띠었다. 봄날 저녁 치고는 쌀쌀하고 거센 바람이 우리를 둑길 위에서 내쫓으려는듯 불어댔다. 결국 어둡고 답답한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하늘도 햇빛이 사라진 저수지의 색을 닮아 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하루 동안 같이 다니면서 전보다 더 편해졌는지 조그마하고 예쁜 입술로 이런 저런 얘기를 재잘거렸다. 잠시 즐거웠지만 수만가지 주제 중 꺼내지 않았으면 했던 단 한 가지, 그녀와 선배의 연애 이야기가 시작된 이후로는 보라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도 멍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짧았던 햇살이 지나고 그림자 밑으로 들어온 나는 다시 한기를 느끼며 굳어갔다. 이후 한참동안 그녀라는 태양이 내 앞에 다시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날의 기억이 햇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은은하게 그녀의 잔상을 흩뿌려줄 뿐이었다. 그래도 기약 없는 짝사랑에는 충분했다. 달빛은 차가웠지만 그로부터 태양의 따스함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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