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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an 12. 2022

냄새나는 가족

아날로그는 냄새다


글 쓸 틈을 얻기 위해 집을 빠져나와 단골 카페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창 너머에서 불어오는 선득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봄의 문턱이라지만, 아직 날이 덜 풀렸구나. 가방에서 천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 어깨를 두른다. 아이가 어릴 적에 쓰던 가재 천 속싸개가 가볍고 포근하다. 목과 어깨가 좋지 않은 나로서는 얇은 겉옷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데, 꼭 제 몸의 깃털 인양 편안하다. 



일교차가 심한 일기에는 아이 속싸개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 얇고 통풍이 잘 돼 아이 몸을 감싸기에 사시사철 유용한 천이었다. 아이가 조금 자라서는 인형 포대기로 사용했었다. 무덥고 습한 한여름 밤엔 이불 대용으로 그만. 배를 살포시 덮어놓으면 아이는 아침까지 잘 잤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편안하게 와닿는다. 늘 가까이서 맡던 딸아이 체취다. 

‘엄마, 그렇게 좋은 데 가면서 왜 나 안 데리고 갔어, 응? 나도 엄마 옆에서 그림 그리고 싶은데.’

아이의 볼 멘 소리가 들린다. 토라져 삐죽이는 아이의 입과, 시샘을 가득 실은 통통한 볼이 커피 위에 동동 떠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엄마 뒤에 몰래 따라붙었지롱. 몰랐지?’

하며 싱긋 웃는다. 읽고 쓰는 내내 아이와 함께다. 아이가 곁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갓난이처럼 바짝 업혀 얼굴을 내 등에 파묻고 있는 것도 같다.




몸 냄새로 매일 사랑하는 이의 존재를 확인한다. 아이의 몸 내음이 퍽 좋다. 밤마다 한잠에 빠져 든 아이들 몸에 코를 파묻는다. 모든 주의 집중을 실은 코를 아들 목덜미와 얼굴 언저리에 가져가 본다. 코끝을 가볍게 킁킁대는 것으로 시작해 아이의 체취를 한껏 빨아들인다. 영락없는 군밤 냄새다. 그을기 진전, 노릇하게 잘 구워진 가을 햇 알밤의 건강한 내음. 그 구수한 몸내에 끌려 오래도록 코를 박는다.



참, 낮에 신나게 뛰놀다 들어온 이 아이의 정수리에선 구뜰한 시래기 냄새가 났었다. 머릿속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힘껏 몸을 구르며 흘린 땀이라 역하지 않았다. 비누 없이 물로만 헹궈도 충분히 가실 하루치 피로, 그것은 결국 아이가 잘 자라나고 있다고 말해주는 미더움의 체취였다.



그 곁에 누운 딸아이에게로 슬며시 코끝을 옮겨 본다. 잘 익은 봉숭아, 어쩌면 살구 향 같은 아이 냄새가 살결을 뚫고 올라온다. 취중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두 볼이 사랑스럽다. 봉긋한 볼 위에 코를 얹노라면 찜기에서 잘 익어 나온 찐빵 냄새가 난다. 아이의 여리고 고른 숨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불안과 동요라곤 없는 어린 존재의 평화로운 숨이다. 농도 짙은 체취가 그 숨에 한껏 실려 나온다. 아이라는 존재는 어쩜 이리도 폐부까지 향기로운지, 가식과 위선이 없는 그 순결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남편은 본래 무취의 사람이었다. 그의 뽀얗고 매트한 속살이 뿜어내는 싱그럽고 맑은 기운이 좋았다. 그 투명한 체취는 그가 앞뒤가 다르지 않을 사람이라는 신뢰마저 주었다. 그런 그가 한없이 미더웠었다.



그런 그도 사회생활 연차가 늘어감에 따라 각종 오염물질로 찌들어 가는 모양이었다. 잦은 외식과 야식, 스트레스로 인한 독소가 곱지 않은 냄새를 풍기며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사용한 수건과 벗어 놓은 옷은 분리 세탁의 대상이 됐다. ‘남편 옷과 걸레는 하이타이(주부들 사이에서 세정력이 제법 강한 것으로 취급되는 전통 세탁세제)를 풀어 세탁기로 팡팡 돌려 빤다’라던 지인의 말에 폭소하고 말았었는데, 이것이 우리 집 얘기가 될 줄이야. 분비물에 절어 누레진 흰 메리야스를 과탄산소다를 푼 물에 담그는데 어쩐지 슬픈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안 가 각방 각인가.  



막 머리를 감고 나온 남편은 내게 지청구를 듣기 일쑤다. 왜 말끔히 샴푸를 헹궈 내지 않느냐는 식의 핀잔이다. 잔류한 세제 향이 역해서기도 하지만, 그 인공 향이 고유한 몸내를 완전히 덮는 게 싫어서다. 여직 난 그의 몸이 풍기던 투명한 체취를 그리워하는 중일까 보다.



체취를 나누는 일이란 지극히 내밀한 사랑 행위다. 복숭아 향내로 가득한 딸아이와 구수한 군밤 내음을 풍기는 아들, 지금껏 못내 그리운 한 남자의 투명한 체취까지. 향의 근사치 값을 끌어다 말하는 것이 아직 최선인 걸 보면, 내가 가진 언어로는 그 고유한 몸내를 온전히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인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것은 자못 진하고 선명해서 전신에 깊이 각인된다. 등굣길에 나선 아이들, 출장길에 오른 남편이 문득 그리워지면 언제라도 지그시 눈을 감는다. 마음으로 소환해 낸 향기는 곧 또렷이 살아나 그리움을 어르고 달래준다. 이것은 우리가 잠시, 혹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언제라도 함께하는 비결이다. 가족의 몸 냄새란 결국 시공을 초월해 우리를 연결해 주는 가장 분명하고 끈끈한 유대의 끈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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