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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an 17. 2022

운전 못 하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아날로그는 소신이다


어쩌다 은행 수납창구를 찾는 날이면 그 수고가 한참 번거롭게 느껴지면서 '스마트폰을 모를 땐 대체 어찌 살았니' 싶어 진다. 어쩌면 운전이란 내게 스마트폰과 같은 존재지 모른다. 미처 경험 못한 탓에 지금의 삶의 방식이 크게 불편한 줄 모르고 사는 것. 그렇다. 나는 면허 취득이 가능한 최소 연령에 스무 해를 더 얹은 나이지만, 여즉 뚜벅이로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걷다가 쉬어 가는 풍경


'운전 안 해'를 함께 외치던 동지들이 아이가 하나 생기고, 둘 생기면서는 '어쩔 수 없이' 운전 모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운전에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하나같이 '운전 배우길 잘했다', '진작 차를 몰 걸 그랬다'며 뿌듯한 마음을 한껏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신문물이 전해 준 갑작스러운 삶의 풍요에 번쩍 눈이 뜨인 이들의 환호 같은 것이었다.



운전 기술이 삶에 더하는 부요와 윤택을 그 누가 부정할까. 다만 차를 몰고 메뚜기 뜀 뛰듯 이곳저곳 건너 다니는 삶은 숨 가쁘게 느껴진다. 빈약한 두 다리에 의지할 망정, 한 장소를 떠 원하는 장소에 닿기까지, 그 작은 여정을 살뜰히 누리는 일이 차라리 끌린다. 두 발로 땅을 든든히 고, 양팔을 휘적거릴 수 있는 것. 때마다 미묘한 공기의 온도와 냄새를 알아채고, 원하는 풍경과 방향에 시선을 둘 수 있는 것. 나날의 새삼스런 자유가 내겐 퍽이나 소중하다.




웬만한 거리는 걷는다. 걸음을 떼는 족족  세상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계절의 풍경과 정취가 그저 나를 스쳐 지나도록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으로 들어가 풍광일부가 된다.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실을 때도 많지만 시선과 두 손 마음대로 가눌 수 있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맘껏 넘나들 수 있으니 그만하면 과분하다. 어쨌거나 운전 무면허의 삶이란 삶의 소소한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고수할 만한 가치로운 일. 잘 구르는 네 바퀴보다 뚜벅이의 두 다리, 그 의외의 쓸모를 속해서 고집하고 싶어 진다. 




무면허의 쓸모를 몇 자 더 적어 볼까나. 무엇보다  발품의 기동성 빼놓을 수 없. 한두 가지 생필품이 떨어지면 근처 마트나 시장 골목으로 불쑥 들어가 긴하게 장을 본다. 딴청을 부리고픈 속마음을 척 받아주는 것도 이다. 걷다가 샛길을 만나면, '새라고 샛길 아니야?' 하며 발이 앞장선다. 길 가다 눈에 띈 카페, 창가 자리가 비어 있으면 잠시 들어가 앉았다 가라고 등을 민다. 추운 겨울날엔 길거리에서 천 원에 세 개 주는 붕어빵도 사 먹을 수 있고, 아웃렛 길거리 매대에서 땡처리하는 옷가지도 좋은 값에 집어올 수 있다. 애초에 집을 떠나 멀리 가는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지만, 생활 반경 안에서 알차고 밀도 있게 삶을 누린다.



운전 무면허는 아들의 불안한 심사를 달래는데도 아주 특효약이다. 초등학생 아들은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난단다. 불 꺼진 방, 잠들기 직전 그는 뜬금없이 엄마의 죽음을 떠올리며 훌쩍훌쩍 울 때가 많다.

"OO야, 엄마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응?" 하고 물으면,

"갑자기 사고 날까 봐."  

한다. 그럼 난 이때다 싶어 태연하게 말한다.

"걱정 마. 엄마 운전 못해서 차 없는 육교로만 다니는데 뭘. 아마 차 사고 날 일은 길 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적을 걸?"

그 한마디 말에 아이는 마음이 푹 놓고는 곧 단잠에 빠져든다. 고것 참 신통하다. '어려서부터 운전 못 하는 엄마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지. 대신 엄마가 앞으로 더 많이 걷고, 더 건강해져서 네 곁에 더 오래도록 머물러 줄게.'  


 




한 번씩 차가 필요할 땐 우리 집 김기사를 대동한다. 남편을 '김기사'로 철저히 객관화하는 이유는 평소엔 한량없이 좋은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새로운 페르소나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힘으로 온전히 통제되지 않는 도로 상황에 역정을 낸다. 욕을 몇 마디 뱉어내는 것으로 화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는. 그는 문제의 차를 확 처박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양보할 마음일랑 눈곱만치도 없다. 김기사의 애꿎은 차만이 그의 심하게 뒤틀린 배알처럼 연신 앞뒤로 꿀렁이며 요동친다. 따지고 보면 그 날것의 욕을 고스란히 들어먹는 것도, 연신 메슥거리는 속을 주체 못 하는 것도 도로 위 개념 없는 여느 운전사가 아 김기사의 옆좌석, 하릴없이 조수석을 지키고 앉았는 나다.     

 


다만 나의 무면허가 김기사에게 짐을 더하는 일이 될까 싶어 한 번씩 괴롭다. 온 가족이 자가용으로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면 오롯이 혼자서 운전대를 책임져야 하는 그에게 퍽이나 미안하다. 대신 운전 중 그가 한 번씩 뱉어내는 거친 말을 잠자코 받아주고,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도 입에 쏙쏙 넣어 주고, 졸음이 틈탈 새라 밝고 명랑한 어투로 곁에서 부지런히 쫑알대는 것으로 그 수고를 갈음하자고 마음먹는다. 운전은 못 해도 나름의 할 일을 찾아 나서는 나란 사람은 꽤나 너그럽고 수준 높은 조수다.





운전 권하는 시대다. 나이 60이 넘어 운전을 시작한 시모가, '너는 젊은 애가 이 좋은 운전을 왜 안 하느냐'라고 물어 오면 꽤나 민망해진다. '얼마 안 있으면 자율 주행차가 나올 테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버티라'고 말하는 지인도 있다. 아마도 내가 겁이 많아 운전대를 못 잡는 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비싼 보험료를 내 가며 좋은 차를 주차장에 세워만 두는 게 아깝지 않으냐'며 누군가 꽤나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고 나오면 솔직히 나도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안에 스마트 기기를 쥐지 않았던 날들을 떠올린다. 더디고 꿈 뜬 날들 속에서 도리어 삶이 실감 나지 않았던가. 시간의 속도를 앞당겨 삶의 효율을 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제는 안다. 운전을 권하는 이들에게 이 오랜 뚜벅이의 소신을 일일이 설명할 길 없어 한 마디 말로 눙치곤 한다. '면허요? 따려면 진작에 땄겠지요. 육아가 가장 힘들다는 10년 세월, 발품 팔아 애 둘을 키워냈는데, 이제 와선 억울해서 못 따요. 하하'  



나이 40이 되도록, 그것도 애를 둘씩이나 키우면서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게 자랑은 아닐 테다. 그렇다 해서 수치도 아니다. 모두가 문명의 이기를 따를 때, 오랜 방식을 고수하느라 답답하단 소리를 듣고 천연기념물 취급을 당한다. 치러야 할 대가도, 방어막을 쳐야 할 일도 많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뚜벅뚜벅 나의 갈 길의 간다. 이것이 뚜벅이 아날로그의 소신이다.



운전을 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조금 당돌해 뵐까?

'아니, 운전을 대체 왜 하시는 거예요? 운전대를 놓을 만한 용기는 혹 없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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