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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an 20. 2022

신발주머니 두고 간 날

아날로그는 애착이다.

등 하원 길, 좀처럼 걷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다. 녀석은 양팔을 크게 벌려 꽃게처럼 촐삭거린다. 그러다 찰나를 틈타 몸을 세차게 한번 흔들어 댄다. 누구 쳐다본 사람은 없는지, 불현듯 걱정이 되었는가? 좌로 한번, 우로 한번 힐끔거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 작약이다.



곧 전력질주다. 저만치 앞서 달려 나가다가는 얼마 안 가 우뚝 멈춰 선다. 뒤를 돌아 엄마 있는 께로 달려왔다가는 다시 달려 나가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직선으로 걷는 나와 달리 녀석의 노선은 늘어진 스프링 형태다. 점잖게 표현해서 그렇지, 실은 영락없이 똥파리가 정신없이 나는 꼴이다.



녀석은 앞을 향해 뜀을 뛸 때도 있다. 한 발은 언제나 도움닫기 태세다. 발바닥이 땅에 닫기 무섭게 녀석의 몸이 붕 떠오른다. 가슴께로 한껏 끌어올려진 발의 힘찬 역공이다. 흡사 맹렬한 햇살이 길바닥에 튀듯 '앗 뜨거, 앗 뜨거!' 하는 꼴이다. 인간 불도저라도 되는가. 녀석은 그렇게 온몸으로 길바닥을 밀며 제 길을 간다.





"엄마 손 잡고 갈래."

아들이 슬며시 한 손을 내미는 날은 대략 난감하다. 틀림없이 내 손을 지지대 삼아 몸을 구르려는 의도다. 녀석에게 손을 내주면 그 몸동작의 울림이 고스란히 내 몸에 전해 와 곧 땅멀미가 다. 그것은 보통 버거운 일이 아닌지라 짜증이 밀려오기 십상이다.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일이 이토록 고된 일일 줄을 미처 몰랐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갈 거면 엄마 손 놓고 혼자 가."

내가 싫은 내색을 하면 아이는 머쓱해하며 슬며시 손을 푼다. 녀석이 한두 발 앞서 걷더니 시선을 자연스레 한 손에 들린 신발주머니에게 둔다. 지금부터가 내 아들의 손에 들린 실내화주머니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실내화주머니로 태어난 것이 조금은 슬프고 어쩌면 기구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녀석이 한 손으로 신주머니를 슬며시 치켜든다. 그러더니 그것을 오른발로 한 번 '빵', 왼발로 한 번 '뻥' 찬다. 발에 걷어 차인 신주머니는 저만치 앞으로 물러갔다가는 반작용으로 꼭 그만큼 되돌아온다. 그러나 제자리를 찾기가 무섭게 불쌍한 신주머니는 또다시 힘껏 걷어 차인다. 녀석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얼씨구나' 흥에 겨워서는 '뻥. 뻥', 양발로 번갈아가며 수중의 목표물을 가차 없이 공격해 댄다.



어떤 날은 신주머니가 땅바닥에 패대기를 당하기도 한다.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양 인정사정이라곤 없다. 심하게 내쳐지는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없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물으면,

"이게 자꾸 무릎에 닿아서 걸리적거리잖아요. 도무지 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한다. 애꿎은 이유로 애맨 신발주머니만 늘 몰매를 맞는 식이다.



대체 왜일까. 주체할 수 없어서다. 그 작은 사내의 몸 안에서 들끓는 생명, 뿜어져 나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힘, 그 힘의 약동 탓이다. 그것을 본인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애꿎게 신발주머니에게 치대고 보는 것인지도.




아이에게 명품 동화전집을 힘닿는 대로 사주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중고거래와 물려받은 옷가지로 아이를 키우는 일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힘이 달려 아이의 약동하는 기운을 넉넉히 받아줄 수 없을 때가 많아 미안하다. 때때로 나는 내 아이 손에 들린 저 신발주머니만도 못한 어미가 아닌가 싶어 울적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만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이해할 수 없다'고 싸늘한 태도로 일축하지 않기를, 아이가 뿜어내는 생명의 기운을 짓누르는 우만은 범치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 손에 무엇을 들려 줄까 수시로 고민다. 아이들이란 멀쩡한 손과 발을 다소곳이 모은 채로 가만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지 않은가. 뭐라도 주무르지 않고는, 또한 그 무엇에라도 발길질을 해대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는 왕성한 생명체. 의지와 육체의 거리가 멀어 슬픈 이 엄마의 마음을 대신해 줄 대상이 절실하다. 무엇이 되었든 아이의 들끓는 에너지를 넉넉히 받아주는 친근한 것이라면 틀림 없지 않을까.



신발주머니. 펀칭 백(punching bag)이 되어 주인의 넘쳐 나는 기운을 가꺼이 받아주는 기특한 존재. 수도 없이 내쳐짐을 당하면서도 아이와 함께 걸어 주는 변함없는 길동무. 그것이 있어 퍽이나 다행스럽다.



오늘 아이가 신발주머니를 두고 갔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내딛는 걸음걸음이 허전하지는 않을지, 주체못하는 힘을 어찌할꼬 하다가 어디 구석에라도 가서 신나게 막춤이라도 추고 있지는 않을는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 못난 어미는 아들이 두고 간 새삼 효능 있는 물건을 멀뚱히 바라보고 앉아 있다. 그러면서 '아이의 등원길에는 신발주머니를 챙겨 꼭 손에 꼭 들려주자'는 다짐만 두고, 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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