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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an 25. 2022

꼭 엄지손톱 밑이 트더라

아날로그는 '새기는' 삶이다.


하얀 침대에 곱게 누워 자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가끔 떠올린다. 정수리께 머리칼이 다 빠지고 없고, 새우처럼 잔뜩 굽은 애처로운 등허리. 몸은 그녀의 오랜 고된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머리에 봇짐을 지는 것으로 아득바득 사 남매를 키워 내야 했던 홀어머니의 한평생. 그 녹록지 않은 생이 작고 가녀린 몸뚱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몸은 섬뜩하기보다는 애처로웠고, 초라하기보다는 차라리 숭고했다.



생은 비누처럼 닳아 없어지는 걸까? 쇠처럼 녹슬어 못 쓰게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초처럼 제 몸을 태우고 태우다 마침내 소멸해 버리는 걸까? 이것은 생에 대한 나의 오랜 물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여인의 마지막 몸을 대한 날, 그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사람의 존재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굽이굽이 삶의 언덕을 지나는 동안 애씀과 노고, 기쁨과 애환의 자취가 제 몸에 양각, 음각으로 세밀하게 새겨지며 나름의 걸작이 되어 간다는 것을. 





꼭 엄지손톱 밑이 트더라


몸은 나름의 흔적을 품는다. 긴 시간 삶을 대해 온 태도가 몸뚱이 곳곳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기록들이 몸 곳곳에 남는 일은 자주 넘긴 책장에 손 떼가 묻어나고, 나무 도마에 수많은 칼자국이 새겨지며, 많은 이의 발길이 닿아 길이 생겨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이치다.



내 둔부 양쪽에는 꼭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검고 푸른 멍이 데칼코마니로 새겨져 있다. 멍든 부위는 어느 늙은이의 흉물스러운 그것처럼 슬쩍 꺼져 있기까지 하다. 그것은 내 몸이 꽤나 오랜 세월 품은 흔적으로,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원 시절, 심지어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너무 긴 시간을 걸상에 앉아 지내며 생긴 결과물이다.



검푸른 멍은 언뜻 일탈 없이 제 자리를 지켜낸 자의 성실함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흔적이 부끄럽다. 생의 작은 욕창 같아서다. 꽤나 긴 세월이 개개어져 몸에 새겨진 정체의 흔적. 누군가는 온몸으로 땀 흘려 세상에 맞설 동안, 오직 책상머리에서 세상을 대해 온 자신이 한없이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느껴진다.



검푸른 멍이 새겨진 알몸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를 닦달했다. 이제라도 온몸으로 땀 흘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머리로만 앞뒤를 재거나, 입만 살아 나불대지 말고, 어떡해서든 하체에 힘을 실어보라고. 새 살이 차올라 납작 꺼진 두 엉덩짝이 봉긋해질 그날을 꿈꾸면서 말이다.




교단에서 내려와 살림을 살면서 손을 쓰는 일이 늘었다. 몇 해 전부터는 엄지손톱 바로 밑 살갗이 툭하면 갈라졌다. 그것은 주방에 물기 마를 새 없는 날이면 반드시 치르게 되는 작은 곤욕이 되었다. 대기가 급작스럽게 건조해지면서 기온이 떨어지는 날엔 상처 또한 깊었다.


왜 하필 엄지손톱 밑인 걸까? 생채기를 얻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음식을 만든다거나, 살림을 돌볼 때 엄지가 닿지 않는 경우란 없다는 것. 열 손가락이 고루 일하는 것 같지만, 실상 엄지의 역할이 막중했던 것이다. 달걀 깨기, 나물을 다듬고 무치는 일, 쌀 씻기, 멸치 배 가르기, 빨래 개키기, 이 모든 일이 만만찮은 일이 되었다. 비단 살림만이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거나 머리를 감을 때, 노트북이나 휴대폰 자판을 두드릴 때, 피아노 건반을 다룰 때, 심지어 딸아이의 머리를 빗어 넘길 때조차도 내 몸의 가장 약한 지체가 신경 쓰였다. 나도 모르게 나의 상한 엄지를 불쑥 추켜올렸다. ‘엄지 네가 최고야’ 하며 그를 치켜세워주고 싶었다.




사소해 뵈는 자국이 때로는 삶에 큰 의미를 새긴다. 새하얀 시트가 깔린 전시대 위, 사랑하는 이들 앞에 놓일 ‘나’란 작품에 부디 큰 값이 매겨지길. 그날을 위해 여느 고뇌하는 판화가의 심정으로 오늘의 삶에 임한다. 자신보다는 타인의 삶을 돌본 흔적이 역력하도록, 머리를 굴리기보다 땀 흘려 애쓴 흔적이 많도록. 그리하여 볼품없는 몸이라도 아름다운 문양들을 한껏 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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