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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Feb 03. 2022

죽음이 삶을 견인한다

아날로그는 연속이다

언제부턴가 많은 불행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 생에서 나 자신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를 만나고부터다. 아이의 탄생, 그리고 그가 성장해 가는 매 순간마다 생의 감각이 또렷해져 갔다. 그와 동시에 질병, 사고, 죽음, 그리고 이별과 같은 앞날에 대한 염려가 엄습했다. 그것은 내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작고 연약한 존재에 대한 일종의 보호본능이자 책임감이었다.



나를 보고 웃는 아이의 천진한 미소 뒤로 문득문득 이별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아이와 함께 누리는 평화로운 날들 속에서 어렴풋이 죽음의 그늘을 알아채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있어 누리는 이 모든 기쁨과 감격이 정해진 시공 속의 유한한 것이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애달팠다. 생의 환희와 절망, 이 불과 물의 상극을 수시로 오가며 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사람은 날마다 잠으로 죽음을 연습한다더라. 유독 감각이 예민하고 엄마에 대한 애착이 큰 아들은 죽음의 작은 예행연습 앞에서 종종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을 감고 잠의 늪에 빠지고 나면, 사랑하는 엄마와 떨어지는 데서 죽음의 감각을 슬쩍 엿본 탓이었을까? 아이는 엄마가 죽을 것이 생각나 겁이 난다고 말했다. ‘네 엄마가 깊은 병에 든 것도 아니고, 이렇게 멀쩡히 네 곁에 있는데’ 싶어 웃음이 났지만, 그 맘을 영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해가 이울 무렵, 놀이터에서 돌아올 아이를 기다리며 밥을 짓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왈칵 터졌다. ‘불 앞에 서서 이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아이가, 이토록 소중한 내 아이가 갑자기 무슨 사고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별안간 찾아든 불안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되고 말았다. 눈물이 가득 괸 눈으로 아파트 난간 너머 아이가 돌아올 길을 내다보았다. 어룽진 두 눈에 붉은빛 가을 하늘이 황홀하게 번져갔다. 스러져 가는 것의 처절한 아름다움에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아, 삶이란 꺼지기 직전 붉게 타는 저녁노을과도 같은 것을……



그날 밤 가벼운 마음으로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겨우 20세 나이의 어린 출연자가 애잔한 감성으로 옛 노랫말을 담담히 읊조리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그 인연들/ 아름다웠던 추억에 웃으며 인사를 해야지’

하는 대목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과연 아이와의 마지막 순간에 의연한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한 그 모든 추억에 감사하며, 웃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줄 수 있을까? 그날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도 시린 날이 될까. 



죽음이 삶을 견인한다. 생의 마지막을 떠올리자면 결국 삶을 돌아보게 된다. 죽음 앞, 한 움큼의 후회를 덜기 위해 하루치의 인생, ‘오늘’을 살뜰히 살핀다.




아이는 오늘 천국을 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지,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과 함께 할 수 있는지 시시콜콜 명랑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천국행 앞에서 망설임이 없으며, 오직 설렘과 들뜬 마음이다. 어린아이에게 천국은 가깝다. 마치 긴긴 여름 방학을 맞아 할머니 댁에 머물듯, 어디 경치 좋은 휴양지를 찾아 떠나듯 여긴다. 아이 덕일 게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천국은 크나큰 위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헤어짐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도, ‘육체의 죽음’이라는 다리를 건너고 나면 우리는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서로를 다시금 끌어안게 되리.



천국 소망을 함께 품은 우리의 ‘오늘’이야말로 천국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오늘 밤에는 아들 곁에 나란히 누워 천국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참이다. 그러다 보면 천로(天路)를 험난하고 고된 과정으로만 여기던 내 마음도 어느덧 아이처럼 가뿐해져 있으리.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던 내 삶의 아날로그는 어쩌면 영원을 향하는 중이었나 보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영원에 맞닿아 있다. ‘오늘’은 저 높은 곳으로 향하는 어느 길목, 어느 모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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