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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Feb 08. 2022

'작가'라는 이름의 새 자아

아날로그는 연속성이다.  


<허기의 쓸모> 출간으로 새 자아를 얻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첫 책 <허기의 쓸모>가 세상에 나왔다. 교단에서 내려와 전업주부로 삶을 이어온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작은 가슴이 뿌듯하다 못해 뻐근했다. 세상의 중심 어딘가에라도 서서 큰 소리로 외치고픈 심정이었다. 나도 내 이름으로 책 한 권을 내게 됐다고. 주방 한편에서 끝 모를 시간을 보내온 나도 다시 세상과 연결되게 되었노라고.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알렸다. 진심으로 기뻐해 줄 지인들에게도. 연을 이어오던 고등학교 은사님들께도 책 출간 소식을 전했다. 휴대폰 메시지 창에 온라인 서점 링크만 걸고 마는 것이 석연찮아 손수 책 한 권씩을 보내드렸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괜스레 위축된 마음에 한동안 연락을 못 드렸는데, 이 한 권의 책이 다시금 연결고리가 되어준 것만 같아 흐뭇했다.



대부분의 은사님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크게 축하해 주셨다. 그러나 평소 각별한 사이라 여긴 몇 분은 별말씀이 없었다. 책 받을 주소지를 묻는 메시지에 돌아온 대답은 무미건조한 주소 정보와 ‘고마워’라는 짧은 한 마디. 책 잘 받아 보셨느냐는 물음에는 ‘응 잘 받았어. 전주 오면 전화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답변. 책에 대한 감상평을 한마디 들려준다거나, 그 흔한 SNS에 제자가 낸 책이라며 사진 한 장 올려 주실 순 없는지. ‘내 잘난 제자가 애 키운다고 멀쩡한 교단에서 내려온 것이 내심 속상했는데, 역시나 그놈이 작가가 되어 그 어려운 책을 냈다’고 동네방네 자랑은 못 해줄망정, 무심한 듯 건조한 반응에 본의 아니게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다행히 출판으로 고조된 흥분과 예민이 잦아들면서 은사님들에 대한 마음도 풀려갔다. 마냥 어리게만 굴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마치 공들인 숙제에 큰 칭찬을 구하는 어린 학생과도 같았다. 나란 작가는 어쩌면 딱 그 수준의 작자였는지 모른다. 아무리 개인적 친분이 있다 한들, 독립되어 세상에 나온 책에 대해서라면 누구라도 객관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을 터. 책 주제에 관심조차 없는 이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의 만남은 이미 새로운 것이었다. 학교 울타리 안의 교사와 제자 관계가 아닌, 작가와 독자라는 새로운 인격의 만남.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네모난 책상을 지키던 여고생이 교실 밖 너른 세상으로 나갔듯, 저들 역시 분명한 취향과 소신으로 세상을 보는 독자로서 삶을 살아내는 중이 아니던가.



이 일은 내 안에 자리 잡게 된 새 자아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추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살던 여고생이 그 틀을 당당히 부수고 나와 ‘작가’라는 새 자아상을 마주하게 된 것. 비로소 인정(人情)으로 사람의 인정(認定)을 구하던 좁은 마음을 탈탈 털어버릴 수 있었다. 이것은 고교시절 은사들과의 관계를 통해 얻게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는 크고도 중한 교훈이었다. 그때서야 마음을 짓누르던 짐이 벗겨지면서 큰 자유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겨우 책 한 권을 들이밀고서는, ‘독자들의 반응이 어떨까?’, ‘세상이 나를 인정해 줄까?’ 노심초사했다. 어쩌면 ‘작가 서지현’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는 것은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지금 필요한 건 두 개의 자아를 구분 짓는 일. 평시엔 범속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다가, 세상에 하고픈 말이 생기면 천연덕스럽게 글쓴이의 얼굴을 하자고 마음먹는다.




아날로그적 삶이란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내가 아름답게 연결되는 삶이다. 감정과 생각이 과거에 메어 오늘날 삶의 기준을 잃어서야 될까. 오히려 지난날의 풋풋한 이야기가 서서히 농익어가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소용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이제 와 조금 여유가 생긴 듯하다. 머지않아 두 번째 책이 나오면 은사님들께는 여전히 낭랑한 목소리로 출간 소식을 전할테다. 책 구입 여부와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다. 작가는 작가의 일을, 독자는 독자의 일을 해나가면 될 테니까. 그리고 나는 꿈같이 아름다웠던 나의 여고시절을 변함없이 추억하며 한동안 그리움에 잠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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