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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Feb 23. 2022

흰 머리칼 앞에 서서

아날로그는 좌표 찾기다

오늘도 거울 앞에 서서 흰 머리칼과 한참이나 드잡이를 했다. 나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따져 물었다. ‘과연 네 깜냥이 나라는 게 말이 되느냐. 내 본래 머리칼과 달리 너는 퇴색했고, 결은 뻗치는가 하면 난데없이 곱슬거리고, 굵기마저 가늘다 두꺼워졌다 하는데, 그런 네가 어찌 나란 말이냐’ 나는 어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내 인생에 예고도 없이 찾아든 이 불청객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흰 머리칼은 이에 질세라 부득불 할 말을 했다. ‘내가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나는 틀림없이 네 일부이며, 겨우 때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뿐인데, 그런 나를 이렇게 홀대하기냐’ 라며 몹시도 서운한 기색을 표했다. 그러고는 세상 억울하다는 듯 계속해서 하소연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두 존재의 팽팽한 공방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한참 후에야 눈을 떠 거울 속에 비친 이의 모습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40대 초입에 막 들어선 한 여자의 모습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한 손을 빗살 성긴 빗 삼아 머리를 쓸어 본다. 흰 머리칼이 제법 많이 눈에 들어온다. 검은 머리칼로 슬쩍 덮어두고 지날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부쩍 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은 덤불 새로 하나 둘 고개를 삐죽이던 것들이, 언제 이렇게 군집해 자라며 세를 확장해 온 것인지. 그 기세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나는 내 머리 위에 하늘로부터 허연 서리가 내려앉는 줄도 모르고, 그저 땅만 보며 살아왔구나!



나이 들어서의 모습을 진지하게 그려본 적이 없었다. 얼굴 어딘가에 깊은 주름이 패고, 원치 않는 부위에 살점이 늘어가며, 머리가 하얗게 세고 성길, 스스로도 어색할 노년의 모습을 말이다. 언젠가 나이 듦의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당장 시급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나에게 삶이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고, 인생의 당면한 과제들은 매번 절박하게 다가왔다. 그러고도 해결치 못한 일들이 아직 많아 가야 할 길은 한참이나 멀어 보였다. 눈앞 목표를 향해 여일한 속도로 달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곤 했다. 나란 사람은 언제까지나 기운 잃지 않고, 젊고 싱싱한 모습에 머물러 있을 거라 단단히 오해하면서.  




그 이탈 없는 경로에 흰 머리칼이 불쑥 끼어들었고, 자꾸만 딴지를 걸어왔다. 그는 앞만 보고 있는 내 시선을 어떻게든 돌려 보려 애썼다. 어쩌다 내 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물론 네 열심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 달려왔잖아. 이제는 무작정 속도를 내기보다 조금 느긋하게 가는 편이 좋겠어. 조금 힘을 빼고 숨을 크게 골라 봐. 시선을 저만치 멀찍이 두고, 호흡을 길게 내쉬면서 온몸으로 모든 순간을 음미해 보라고.’



그 진심 어린 말 앞에서 나는 그만 마음을 놓아 버렸다. 이쯤 되니 그를 나의 당연한 일부로 받아들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지나온 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화상이자 앞으로의 길을 함께 걸어갈, 인생의 친절한 동반자 같았다. 



그의 말대로 속도를 조금 줄이는 편이 옳을지도 몰랐다. 찬찬히 내딛는 걸음에 삶의 요령과 지혜를 얼마간 더하면 될 테니까. 가끔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하면서. 지난날의 크고 작은 실수를 차분히 되짚다 보면 그것이 내일의 원동력이 될 테다. 아직 머리가 반백에 미치지 않은 걸 보면, 막판 스퍼트를 끌어올릴 시점은 아니다. 남은 힘을 쏟아부을 그날을 위해 전략적으로 완급을 조절하고, 힘을 남겨두어야지.




참, 미용실 예약을 걸어두었는데. 10년 차 드나드는 나의 단골샵 원장님은 이번에도 분명 한마디 할 것이다. ‘더는 안 되겠는데요? 이쯤 되면 아무래도 염색을 하셔야 해요.’ 그는 손님 머리에 내려앉은 노화의 분명한 증거물 앞에서 타당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마치 그것이 내 몸에서 진행되는 노화를 당장 멈추게 할 어떤 비책이라도 되듯이. 그러면 나는 이렇게 응수할까 보다. ‘차라리 반백이 되면 분위기 있어 보일까요? 그냥 두려고요. 그게 바로 지금의 나니까요.’     



나이 듦의 과정은 결코 추하지 않다. 지레 겁먹거나 기죽을 일도 아니다. 젊음의 절정을 막 빠져나온 때야말로 삶의 진정한 출발선이다. 명백한 인생의 유한함 앞에서 얼마간의 긴장과 초조함을 품고 제법 진실하게 삶을 살아갈 준비를 마쳤으니까.



흰 머리칼이 아니었더라면 늙는 줄 모르고 나이들 뻔했다. 하룻밤 새 꽃잎을 떨구고 마는, 허망한 목련처럼. 오늘도 태연히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고 반대편 머리칼을 차분히 쓸어 본다. 하얗게 센 머리칼이 눈부신 조명 아래서 은빛으로 반짝인다. 앞으로 마주할 나의 남은 날들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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