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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r 02. 2022

삶과 뜨개

아날로그는 좌표 찾기다

삶은 뜨개다. 자신을 둘러싼 시공을 두 개의 대바늘 삼아 하루, 또 하루를 한 땀 한 땀 짜내려 가는 일. 



곧 돌이 되는 조카를 위해 망토를 뜬 적이 있다. 뜨개 솜씨가 서툴러 어쩌다 코를 빠트려 가면서. 그러나 ‘한두 코쯤이야’ 생각하며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다음 코를 꿋꿋이 이어나갔다. 



언뜻 보아 남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뜨개가 완성되어 갈수록 빼먹은 코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제자리에 걸리지 못한 한두 코 탓에 언젠가 뜨개옷이 걷잡을 수 없이 풀려버릴 지도 모를 일. ‘풀린 올을 모른 척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한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뒤가 켕겼다. 틀림없이 어린 조카에게 두고두고 미안하게 될 일이었다. 



뜨개는 바느질과 달라서 구멍 난 부분만 콕 집어 꿰맬 수가 없다. 대바늘에 걸린 앞코, 뒤코를 지나온 순서대로 차근차근 풀어내야만 비로소 문제가 되는 부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애써 뜬 뜨개를 풀기로 했다. 많은 품을 들여 먼 길을 돌아가야 하더라도 기꺼이. 일의 결국을 말하자면, 나는 그 고된 과정을 통해 느끼고 배운 바가 컸다. 




내게는 더이상 뜨개를 이어갈 수 없다고 여겼던 때와 같은 날들이 더러 있었다. 더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들이었다. 나는 이전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사소한 실수나 대단한 후회들, 가슴속 생채기나 제법 큰 상처, 어쩌면 여태 이기지 못하는 커다란 슬픔들까지. 인생이라는 뜨개에서 원치 않게 빠트린 코들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된 이름은 ‘결핍’이었다.



조카옷을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 인생의 뜨개실도 과감히 풀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지난날의 나와 살뜰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 지금껏 적당히 덮어두었던, 내 안의 해묵은 이야기들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아직 용납지 못한 이야기와 가슴에 게딱지처럼 눌러 붙은 슬픔, 무엇보다 그토록 외로움 많았던 어린 날의 결핍들을. 



뜨개실을 풀며 지난날의 나와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조그만 등을 도닥여 주는가 하면, 어린 나를 가슴으로 한껏 안아주었다.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따끔하게 나무라야 할 일도 있었다. 하나의 오해가 풀리고 나면, 마음이 꼭 한 뼘만큼 넓어졌다. 사심 없이 지난날을 바라보자니 재해석의 여지도 생겼다. 이미 제출한 답안이나, 끓어 넘친 냄비처럼 손 쓸 수 없는 게 인생인 줄 알았는데, 다시 매만질 여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가끔은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 인생인가 한다. 앞만 보고 달려 나가다가는 큰 코 다친다. 아니, 큰 코 빠트리게 된다. 빠진 코를 알아챘다면, 뜨개실을 설설 풀어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손 쓸 기회가 영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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