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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r 09. 2022

일주일 감기몸살 끝에 얻은 것

아날로그는 '인간다움'이다

물맛만이 또렷하더라


우리는 '잠을 줄여서라도'라는 말을 관용어 쓰듯 너무 쉽게 내뱉으며 산다. 이것은 보통의 일상에 '야심 찬 일' 무엇 하나를 끼워 넣을 때, 가장 먼저 잠을 희생시킨다는 뜻일 게다.



잠을 줄여가며 아이를 키워 내는 세상 모든 엄마를 응원하고 싶은 밤이다. 아이가 누울 때 함께 누웠다가, 그가 눈을 들 때 함께 눈을 뜬다면, 엄마 체력에도 큰 무리가 없을 테다. 그러나 아이처럼 아무 근심 없이 잠에 빠져들기엔 우리에게 남겨진 삶의 의무와 역할은 꽤 만만찮다.



기본 살림과 육아 이외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자면 시간의 사투가 더해진다. 아이가 누울 때 함께 누웠다가도, 곧 천근만근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켜 포근한 잠자리를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내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글줄 하나 더 끄적거리고 싶어, 있는 시간을 쪼개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애초 잠에 할애된 시간을 종종 끌어다 쓰고, 또 그리하고는 했으니 말이다.




학기와 방학의 경계가 흐릿한 수많은 날들과 두 달이 넘도록 이어진 아이들 방학, 게다가 남편의 잦은 재택근무까지. 모든 게 불안한 형국에서 식구들을 뒷바라지하는 중에도 글쓰기의 끈을 놓을 수 없어 마음을 졸이며 전전긍긍했다. 주부로서 그렇게 살벌한 한 해를 살아냈음에도, '틈새 글쓰기'의 갈증에 시달려온 터라 더 야문 꿈을 꾸기까지 했다. '아이들 개학만 해 봐라. 어디로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 제대로 원고에 몰입할 테니까.' 내 몸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독종이었다. 인정사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 이상 각박한 주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하던 개학일, 큼지막한 가방을 메고 현관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나는 그대로 퍼져버리고 말았다. 도통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가늠할 겨를 없이 난 깊은 잠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간 못 잔 잠을 자느라 하루 20 시간은 족히 바닥에 붙어 지냈다. 사지는 축 처진 채 한없이 늘어져 있는데, 몇 가지 상념만이 몽롱한 정신 사이를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이를테면, '그동안 잠을 줄인 것은 마치 임금을 가불한 것이나 다름없구나', '무리하게 몸속 에너지를 끌어다 썼으니 고갈된 힘을 어떤 식으로든 채워 넣어야 하나 보다', '일 년 내내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한결같은 속도로 삶을 살아낸다는 건 제 몸에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하는 생각들.





기운을 차리고 눈을 떠 마주한 세상은 영 낯설었다. 둔부에 닿는 변기 안장은 소스라치게 차가웠고, 무심코 튼 수돗물은 가슴까지 시렸다. 마음만은 커피가 간절해, 손 커피를 내려 한 모금 입에 머금었으나, 탕약같이 쓰기만 한 맛에 곧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평소 즐겨 듣던  방구석 라디오는 또 어떤가. 틀림없는 애청 채널이건만, 라디오 진행자의 멘트와 깔리는 음악은 왜 그리 생경하기만 한지, 그것은 내 처지와는 동떨어진 딴 나라 이야기와 선율이 되어 귓가를 겉돌았다.



왜 미처 몰랐을까. 아무리 쉬워 보이는 하루라도, 그 하루의 무탈함과 평온함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장치와 고마운 요소가 치밀하게 맞물려 있음을. 그리고 온전한 몸과 정신이 아니고서는 스스로가 일상이라는 그 작은 톱니바퀴 안에 온전히 녹아들 수 없어, 하루치 삶조차 온전히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며칠간 감기몸살 끝에 얻은 가장 큰 소득이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넘어 스스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점이었다. 극진한 관심과 대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나란 존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유기체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때 자신의 삶은 그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이토록 귀한 몸이건만, 그간 은연중에 스스로를 기계 다루듯 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간과 노동력을 일정하게 투입하면 그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는 예측 가능한 장치쯤으로 여기거나, 어쩌면 투입량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산출해 내는 고성능 시스템으로까지 오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보다 훨씬 귀한 몸이었나 보다. 얼마나 더 극진한 손길이 필요한 것인지, 한번 고장 난 몸은 쉽사리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회복 기념으로 외식을 나갔는데, 물맛만이 또렷할 뿐 아직 입이 쓰다. 이제부터라도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이는 데 용을 쓰기보다는, 귀하신 몸 제대로 대접하며 거사를 도모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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