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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r 14. 2022

무채의 유년과 빨강머리 앤

아날로그는 좌표 찾기다


사진출처: pixabay


어린 시절의 찬란함은 종종 색종이의 총천연색에 빗대어진다. 유년의 때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티 없이 맑고 행복한 시기라서 일 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의 유년은 어둡고 칙칙한 날들이 많았다. 애써 추억하려 해도 그날의 즐거움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무채색으로 범벅된 날들이었다. 나는 아들 손주들에 대한 할머니의 심한 편애로 집에서는 숨을 죽여야 했고, 동네 골목에서조차 마음을 나눌 또래가 없어 자주 외로웠다. 생계를 책임지느라 어깨가 무거운 아빠와, 고부간 갈등으로 삶의 기쁨을 잊은 지 오래인 엄마. 부모님조차 어린 딸의 마음을 살필 여유란 없었다. 게다가 요즘같이 유치원 다니는 일이 당연치 않던 시절에, 그 흔한 인형 하나 품 안에 안겨준 이조차 없었으니, 도대체 어린 소녀는 하루, 또 하루를 무슨 즐거움으로 연명했던 걸까.



어린 시절의 크고 작은 기억들이 짙은 음영이 되어 내 삶에 한껏 드리워져 있었다. 몹시도 강렬한 어떤 날의 장면은 머릿속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언제까지나 군림할 작정인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구석이 있는 내 기질을 두고 하릴없이 그늘진 어린 날을 탓했다. 또렷한 실체도 없는 유년의 결핍을 붙들고, 그렇게 혼자 씨름하듯 괴로워했다.  



아주 흘러버린 시간들,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살아낼 수 없는 나의 유년 앞에서 자주 무력함을 느꼈다. 숙명인양 제 배설물을 일평생 끌고 다니는 쇠똥구리처럼, 나는 언제까지나 유년의 우울 아래 머무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날의 탁한 기억들을 뭉텅 떨궈내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두텁고 어두운 암막커튼을 확 걷어버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밝은 대낮의 삶이라도 완전히 잠식당할 판이었으니.



그러던 어느 날 희망의 불씨 하나를 보았다. 만화영화 <Anne of Green Gables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으로부터 뜻밖의 실마리를 얻은 것. 앤의 기구한 처지와 나의 우울한 유년을 자못 진지하게 견주어 보던 중, 그녀에게서 작가, 혹은 연출가의 기질이 크게 눈에 띄었다. 앤은 자신의 별난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인생의 주인공 삼고 있었다. 원치 않는 불운을 삶의 의미로 승화시킬 줄도 알았다.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과 거침없는 수다는 일종의 치유제요, 자기 존엄을 지키는 보호막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앤을 통해 문학이 지닌 치유의 힘을 실감했다. 앤이 가진 재능이 탐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린 내게도 꼭 필요한 능력이었던 것을. 



음울한 기운과 함께 끈덕지게 나를 따라붙던 유년의 날들을 마주할 용기가 났다. 유년의 잔상을 수시로 드나들며 흩어진 기억을 짜깁기 시작했다. 그것을 한 편의 필름 삼아 머릿속으로 자주 돌려가면서. 어느 날의 장면은 종이 위에 남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됐다. 장르는 동화를 닮은 수필 쯤 될까. 전개가 매끄럽진 않지만, 제법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 많이 아팠던 날이 도리어 애틋한 그리움이 되거나, 마냥 행복했던 순간에도 그늘진 슬픔이 머무를 수 있음을 그 덕에 알게 됐다. 



다음 이어지는 글은 스스로를 주인공 삼아 써 내려간 이야기의 아주 작은 일부다. 지금은 어른이 돼 버린 주인공 아이, 그 누구보다 그녀가 이 이야기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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