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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r 18. 2022

은행나무 곁에 서다

아날로그는 좌표 찾기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 가을은 가을은 노란색 은행잎을 보세요

그래 그래 가을은 노란색 아주 예쁜 노란색...’



가을을 노래하던 딸아이가 아이가 대뜸 말했다.

“엄마, 소나무만 옷을 안 갈아입었어.”

아이의 시선이 머문 곳을 따라가 보니, 놀이터 긴 팬스를 따라 몇 그루의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번갈아가며 서 있다. 깊어가는 가을, 은행나무 이파리는 노랗게 익어 흐드러져 있는데, 소나무만은 계절의 변화에 무심한 듯 낯빛에 변화가 없다. 추위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도 몸의 빛깔을 결단코 바꾸지 않겠노라 심한 오기를 부리는 중이다.



소나무를 올려다보는 내내 지난날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소나무 같은 삶이었는지 모른다. 고교 시절에야 입시에 골몰하느라 어쩔 수없이 경직된 삶이었다 치지만,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도 한번 굳어진 삶의 방식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2002년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온 나라는 평정심을 잃고 한창 광기어린 레드(Red)로 물들어 가는 중이었다. 거리마다 붉은 함성, 붉은 물결이 차오르고, 모두가 응원 열기에 넋을 잃어 가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자꾸 숨고만 싶었다. 애국지정(愛國之情)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축구 빅매치를 두고도 애를 태웠다. 다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응원 무리에 끼어 미친 척 미쳐갈 용기가. 무엇보다 스스로를 잘 아는 탓이기도 했다. 나는 군중 속에서 누구보다 크게 고독해 할 사람이었고, 그런 자신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마침 기말고사를 앞둔 기간이었다. 나는 시험을 억지 핑계 삼아, 하릴 없이 대학 도서관 한 구석을 지켰다.   



붉은 옷을 입은 수많은 학우가 커다란 전광판이 선 민주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멀리서도 그 대단한 응원의 열기에 데일 듯 했다. 우레의 함성이 커다란 파동이 되어 소심한 이의 정지한 가슴까지 찾아왔다. 그것이 곧 무심한 듯 차가운 심장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꾸지람의 방망이질이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말해주는 내면으로부터의 나무람이기도 했다. ‘나란 사람은 일찍이 놀아본 적이 없어, 마침내 판이 깔려도 영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됐구나.’ 나는 두 마음의 싸움으로 크게 괴로워했다. 



나는 여전히 분위기를 잘 타지 않는 사람이다. 흥이 부족한 탓에 이벤트나 기념일을 챙기는 일이 늘 어렵고 서툴기만 하다. 차라리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젊은날의 광기에 제대로 한번 놀아나지 못한 탓에 일상의 범속을 깨고 낯선 세계로 발을 내딛는 일이 두렵다. 작은 여행길 앞에서조차 아이처럼  달뜨지 못하고, 일단 주저하고 볼 때가 많다. 매사가 그렇다. 평화롭고 잔잔한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으면 도망치듯 집안일로 달려가고, 또 책 속에 숨고 마는 게 나다.




아이가 부르던 동요를 통해 눈길을 준 소나무는 틀림없이 내 모습이었다. 사심 없이 높고 맑기만 한 가을 하늘 아래 무심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측은했다.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의 계절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뻣뻣하게 굴었던가. 마침내 미련이 남고 말 일이라면, 스치는 바람에라도 철없이 한번 몸을 내맡겨 볼 것을. 



그러나 한번 굳어진 성정을 바꾸는 게 어디 쉽겠나. 이제 와 일탈을 꾀할 용기가 나지 않아 누군가의 흥이라도 빌고 싶어 졌다. 나는 나의 은행나무를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파랑새처럼 가까이 있는 남편은 흥을 타고난 사람이다. 주변 분위기에 어깨를 들썩일 줄 알고, 시대의 노래를 아는 사람. 기분과 때에 맞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청이 좋지 않아도 감정에 취해 노래 한 자락 걸쭉하게 뽑아낼 줄 아는 흥부자.



나의 은행나무를 벗 삼아 대중음악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고즈넉한 밤이면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챙겨보는 일이 어느덧 우리 부부의 커다란 낙이 되었다. 가요 오디션은 그 자체로 큰 즐거움이었지만, 다양한 노래 장르와 시대 감성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 노래마다 참가자의 사연, 혹은 휴먼스토리가 녹아 있어 구구절절 노랫말이 진정성 있게 들렸다. 



오디션 프로를 시작으로 어린 나이에 흘려버린 노래를 다시 꺼내 듣기 시작했다. 내친 김에 시대를 거슬러 7080 가요까지. 가수와 노래의 배경이 궁금해지면 언제라도 흥부자의 설명을 구했다. 알고 들을수록 노랫말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것은 곡조 있는 시구나 다름없었다. 



늦깎이로 조금씩 물들어가는 중이다. 늘 푸른 소나무가 타고난 성정을 버릴 수 없어, 주변 나무가 떨군 이파리를 기꺼이 뒤집어쓴다. 언젠간 온몸이 노랗게 물들 날도 꿈꿔 본다. 세찬 바람에 은행나무가 어마한 이파리를 떨구는 날, 푸르른 몸이 온통 샛노란 물결로 뒤덮이는 발칙한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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