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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y 27. 2022

둥근 해가 떴습니다

아날로그는 좌표 찾기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가정에서 크게 설 자리가 없었던 아이에게 학교는 맘 놓고 숨 쉴 공간이었다.



국민학교 입학식의 일이 기억에 또렷하다. 그때만 해도 동네마다 아이도 많고, 학교 규모도 컸던 시절이었다. 천 명은 족히 모여들었을까? 식이 치러진 학교 대강당은 그 해 신입생과 입학을 축하하러 온 가족들로 크게 북적이고 있었다.



단상 위 선생님 한분이 구성진 동작과 함께 동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를 가르쳐 주시더니, 이어 무대 자원자를 구했다.

“방금 선생님이랑 한 노래랑 율동, 여기 나와서 해 볼 사람 있어요?”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지면서 긴장감이 돌았다. 그때 거침없이 손을 들고 “저요!”를 크게 외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천여 개 눈동자의 주목 속에서 당당히 무대 위로 올랐고, 커다랗고 둥근 해를 온몸으로 표현해 가며 씩씩하게 무대를 마쳤다.



“저 애, 소집(소 키우는 집: 우리 집은 앞마당 작은 축사에서 소 서너 마리를 키웠던 터라 동네에서 ‘소집’으로 통했다) 막내딸 아니여?"

“기여(‘맞아’의 전라도 사투리).” 

“얌전한 애가 오늘 뭔 일이래."



무대 아래서 동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평소 눈에 띄지 않던 아이가 보인 의외의 당찬 행동에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전혀 새롭거나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간 누구에게도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했던 아이, 그 아이 속에 응축된 인정에의 욕구가 마침내 기회를 만나 단번에 표출된 것이었을 뿐.




솔로 무대로 화끈하게 신고식을 치른 아이는 학교 울타리 안으로 무사히 입성했다. 칭찬과 인정에 목말랐던 아이는 선생님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다. 선생님의 질문에는 언제나 목소리를 한껏 키워 답을 하는가 하면, 수시로 손을 들어 의사를 표했다. 2학년 때는 교내 ‘나의 자랑 발표하기’ 대회에 나가 고학년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1등 상을 탔다. 제 입으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대회에서 1등이라니. 대체 그것은 얼마나 낯이 두터워야 가능한 일인가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무슨 일이든 나서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선생님 심부름도 도맡았다. 교사의 전령이 되어 이 교실, 저 교실을 오가며 그날의 작은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자신이 무척이나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이 일과 중에 개인 은행 일을 맡겨 교문 밖을 나섰던 날도 더러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찔하다.) 선생님은 내심 그 일이 맘에 걸렸던지 엄마한테 ‘아이가 하도 똘똘해서 믿고 보냈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시더라고. 




학교에 관해서라면 유달리 포근하고 아늑했던 공간에 관한 기억이 짙다. 교실이나 복도 바닥은 전부 나무 재질이었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어도 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 나무 마루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러도 크게 다칠 위험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교실 뒤편, 맨바닥에서 친구들과 공기알을 던지며 놀았다. 청소 시간엔 삼삼오오 퍼지고 앉아 수다꽃을 피웠다. 양초로 칠한 바닥을 마른 손걸레로 문지르며 쉼 없는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아쉽게도 청소시간은 곧 끝이 났다. 



심지어 학교는 계단 난간도 윤기 나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나는 2층, 혹은 3층 교실을 빠져나올 때면 계단을 밟지 않고 꼭 난간을 탔다. 한쪽 엉덩이를 난간에 척 걸치고, 맞은편 다리를 그 위에 마저 얹어 몸을 ‘끙차’ 한번 구르면 한달음에 미끄러졌다. 거침없었던 낙하의 그 짜릿함과 희열이란! 나무 난간을 십수 번씩 오르내리던 학교에서의 하루는 그저 유쾌하기만 했다. 학교는 결핍을 앓던 아이에게 냉담치 않고, 오히려 넘쳐나는 기운과 서툰 몸짓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나무를 닮은 학교가 그렇게 나를 키워냈다.



지평선 아래서 숨을 죽이다 막 떠오른 해처럼 아이는 새 세상이 주는 활기 속에서 기를 펴고 자라났다. 무대 위에서 아이가 온몸으로 표현했던 그 둥근 해는 다름 아닌 아이 자신이었다. 삽시간에 칠흑 어둠이라도 삼킬 기세의 아침 해처럼, 아이의 내면도 무언가로 들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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