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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ul 23. 2022

사라진 별명 '서도도'

아날로그는 좌표 찾기다

회교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유년의 때를 건너 새로 만난 학교는 온통 시멘트로 둘려 있었다. 사시사철 냉기를 머금은 회색빛깔 교실과 복도는 에누리가 없어 보였다. 넘어지면 무릎이라도 까일까, 걸음걸이에 조심성이 생겼다. 이전처럼 교실 찬 바닥에 퍼질러 앉아 친구들과 정담을 나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딱딱한 걸상에 각 잡고 몸을 걸치는 외에 달리 몸을 기댈 곳은 없었다. 거기다가 교복치마는 딱 무릎 길이로 재단된 H라인. 막 유년의 때를 빠져나온 우리들에게 학교는 은연 중 절제와 조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 한 분이 나를 ‘서도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 내내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 칠판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 학생의 모습이 그분의 눈엔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거만하다’라는 뜻을 품은 ‘도도하다’의 본래 의미와 달리, 선생님은 칭찬의 뉘앙스를 담아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 말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학기 초 냉랭한 학교 분위기에 잔뜩 얼어 있는 내게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중학교 시절은 호기심이 넘쳐나고 한창 감수성 돋는 시기였다. 누군가의 칭찬 한마디에 의기양양해졌다가도, 또 다른 이의 핀잔에 쉽사리 주눅들 수 있는 나이. 어쩌면 어른의 단 한번의 곡해와 오해로 확 어긋날 수 있는 때이기도 했다. 나는 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씀만 잘 듣는 모범생이 되고 싶진 않았다. 친구들에게 흠 없는 모범생의 모습으로 각인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공부도 잘하면서 노는 일에도 빠지지 않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욕심 사납게도 둘 다를 원했던 것이다. 



유독 규칙이 많았던 중학교 생활은 시멘트 바닥처럼 차고 여유가 없었다. 그런 탓에 일탈에 대한 욕구가 때때로 일었다. 까진 애들(노는 애) 틈에 끼어 나도 보란 듯이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모범생 친구 곁에서는 그 아이처럼 바른 생활로 인정받고 싶었고. 내가 일삼았던 일탈이란 고작 수업 중에 소설책 보기, 수업 땡땡이치고 매점 가기 정도였다. 그것도 크게 화낼 줄 모르고, 제 딴에 만만해 뵈는 선생님의 시간만 골라서. 아무래도 내겐 화끈하게 반항아가 될 기질은 부족했던 것 같다. 자기 정체를 확립하느라 양 갈래 길에서 힘겹게 줄타기를 했던 것, 그것이 내가 앓았던 ‘중2병’의 정체이자 이유였다. 




어쨌든 친구들은 ‘도도하다’는 말의 뜻을 잘 이해 못했다. 나조차도 훗날 사전을 들추고 나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한창 자기 색깔을 찾느라 골몰한 내게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덧입혔을 ‘서도도’라는 별명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루 중 나의 어떤 모습 때문에 밤새 신열을 앓았다가도,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다른 내가 되어 있던 사실에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어떤 식으로든 팔색조로 변신할 수 있었던 그날의 유연성만큼은 절실하다. 오늘의 나는 너무 많은 고정관념을 끌어 안고 경직된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여전히 ‘내가 꿈꾸는 다른 나’가 될 수 있는가? 성장통은 분명 고통을 수반하는 아픔이나, 그것의 결국은 노쇠와 죽음이 아닌 한 단계 도약한 내일이다. 



아무런 고통 없이 너무 쉽게 잠에 빠져드는 매일의 밤이 야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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