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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Sep 07. 2022

봉숭아 네일아트

아날로그는 나다움이다


날이 새기만을 고대하며 잠을 청하던 때가 있었다. 잠결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왔다. 손톱 위에 빻은 봉숭아를 올려 총총 감아두었던 것인데, 실을 너무 세게 조인 탓이었다. 어린 시절, 바쁘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차마 조르지 못해 혼자 힘으로 봉숭아물을 들여야 했던 조금은 아픈 기억, 그래서 해마다 여름철이면 내 아이들 손톱에 봉숭아 꽃잎을 얹어준다.



봉숭아는 왠지 화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꽃이다. ‘울 밑에 선 봉선화’라고 했던가. 그저 마당 한편에 두고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두고 보는 게 좋다. 옆집 이웃 같고 친구같이 정겨워서다. 외모도 그리 말끔치 않다. 길 먼지가 부옇게 내려앉은 초록 잎새와 손대면 ‘톡’ 하고 떨어지고야 마는 꽃잎, 흠 많고 연약한 봉숭아라 더 친근하다.




아이들 할머니가 보내주신 봉숭아를 그늘에 펼쳐두고 살짝 말려 굵은소금 몇 꼬집을 더해 콩콩 찧었다. 언제나 그렇듯 거사가 치러지는 건 잠잘 때가 다 되어서다.

“엄마, 비닐 속에 빻은 봉숭아 색깔이 꼭 파김치 같아요.”

‘이 야심한 밤, 열 손가락에 비닐을 하나하나 쫌메고 있는 니 애미가 파김치다, 요년아.’

 “엄마, 근데 엄마는 왜 안 해요, 이 예쁜 것을?”

 “엄마도? 그럼 엄마는 새끼랑 약지, 그리고 엄지발톱에만 올릴게.”



잠자리에 든 아이들이 평소와 다르게 잠을 뒤챘다. 날이 밝아 비닐을 벗겨내니 붉게 물든 손톱과 손가락이 마디마디 드러났다. 활짝 웃는 아이들, 마음까지 붉게 상기되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도, 밥숟가락을 쥐어도, 어디에 얹고 보아도 사랑스러운 손이 되었다. 도도하고 새침한 이의 살짝 치켜든 턱처럼 저도 모르게 자꾸만 손끝이 올라간다.



 “엄마가 들은 얘긴데 첫눈 내릴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데.”

 봉숭아물이 첫눈을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지만, 아이들에게 순정(純情)이란 먼 이야기 같아 꿈으로 치환해 말해주었다.

 “정말?”

 순간 딸아이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 근데 어쩌지 엄마. 난 벌써 꿈이 7개나 되는데. 팝스타, 요리사, 발레리나, 미용사, 피아니스트, 유치원 선생님이랑, 음 그리고 패션모델도 어제 생겼는데.”

 꿈을 헤아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펼 때마다 붉은 손톱이 다부진 꿈처럼 화려하게 반짝인다.

 “우리 딸은 손가락 하나당 꿈 하나로 쳐도, 며칠 지나면 두 손 두 발 다해도 모자라겠는데?”



벗겨질 염려도, 때마다 손볼 필요도 없는 천연 네일아트. 아이들은 붉게 물든 손발톱을 자주 들여다보며 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성장이 빠른 아이들이라 꿈을 꾸기가 무섭게 봉숭아물이 빠져나갔다. 손발톱은 때마다 새로운 모양새로 연출되었다. 얼마간 남은 붉은빛과 손발톱의 하얀 심지가 자아내는 색채의 농담이 백미다. 그러다가 손발톱 끝에 초승달이 걸린 날, 아스라이 머문 그 주홍빛에 애간장이 탄다. 아이들 손발톱에서 꿈의 주홍빛이 말끔히 지워진 것은 야속하게도 첫눈은커녕 가을이 깊어지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 문턱에 다다른 어느 날.

 “세상에! 엄마는 아직도 봉숭아물이 남아있어요? 우리는 벌써 없어졌는데!”

 우연히 내 발을 내려다본 아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게, 엄마 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어른이라 발톱이 잘 안 자라나 봐.”

 발톱이 이렇게 더디 자라는 줄 몰랐었다. 난 이렇게 시들어만 가는 걸까, 하고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히려는 차에 딸아이가 달려 나왔다.

 “와, 정말이네! 신기하다. 엄마 발톱은 첫눈 맞을 수 있겠다! 소원도 이룰 수 있고.”

 그 뒤로 봉숭아물은 내게도 꿈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작고 약한 미물에 놀라운 지혜가 있음을 보았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모습 뒤에 뜻을 이루고야 마는 투지가 있다. 한여름 뙤약볕과 장마철 폭우를 견디며 씨앗을 보듬던 봉숭아는 행인의 손끝을 타고 널리 퍼진다. 그 이듬해 길목 곳곳을 넘나들며 수천 송이 꽃을 피울 것을 기약하면서. 그것으로 모자라 누군가의 손톱 위에 올라 ‘기쁨’으로, ‘기다림’으로, 때로는 ‘간절함’의 이름으로 오래도록 붉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해 첫눈을 맞은 내 몸의 봉숭아물이 두 번째 겨울을 나고 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나의 수줍은 꿈이 아직 발끝에 걸려있다. 실낱같은 봉숭아물과 함께 사라져가는 한여름 밤의 발간 추억, 그리고 선명해만 가는 나의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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