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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y 25. 2023

나의 당근 정복기

인생은 조금씩, 찬찬히 알아가는 것

당근의 위상이 급부상했다고 느낀 건 디저트계에서 당근케이크가 급 유행의 물살을 탈 때였다. 케이크라 하면 하얗고 폭신한 생크림 사이사이로 딸기나 파인애플 같이 상큼하고 쥬시한 과일 조각이 끼어들어간 빵의 어떤 형태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과연 이 거칠고 딱딱한, 여러모로 이물감 느껴지는 당근과 케이크의 조화라니, 대체 그 맛은?



처음 맛본 당근케이크의 맛이 다소 충격적이었던 건 너무 맛있거나 반대로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익히 알던 당근 맛이 안 나서였다. 촉촉한 당근 시트에 진한 크림치즈를 겹겹이 쌓아 올린 케이크는 대놓고 당근 맛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꾸덕하게 입에 감기는 질감 사이로 은근하게 당근의 풍미가 감돌았다. 케이크가 표방하고 나선 이름과 그것의 주재료, 토핑으로 올린 미니어처마저도 분명 당근이건만 어찌 당근케이크에서 당근 맛이 안 날까. 맛의 신비는 당근의 풍미가 계피나 맥넛, 크림치즈 등의 여타 재료와 제법 잘 어우러진 데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당근이 과연 팔색조로 변신을 꾀할 수 있는 식재료라면 당근케이크는 당근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고상한 버전의 음식아닐까 생각했다.






요즘 김밥 좀 만다는 집들의 김밥은 생김새가 영락없이 '당근 김밥'이다. 김밥속 당근지분이 상당하단 이야기다. 생당근을 잔뜩 품은 당근의 속살이 꽃처럼 화려하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뚜렷한 당근이건만, 먹는 이의 기호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그 주홍 얼굴을 들이밀고 보는 김밥의 기세가 대범하고도 당돌하다. 저돌적인 비주얼만큼이나 맛도 억척스럽다. 솔직히 당근의 튀는 맛이 여러 재료의 조화를 해친다는 게 지극히 개인적인 시식평이다.  



당근 라페 , 통겨자를 넣기도, 빼기도 한다.


불과 몇 달 전 생당근을 채 썰어 만든 당근 라페가 SNS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당근 그 날것의 맛을 과감히 즐기려는 레시피가 젊은 층에서 큰 사랑을 얻은 것이다. 채 썬 당근에 통겨자, 소금, 레몬즙, 거기에 올리브유를 가미해 만든 라페를 샐러드 자체로 즐기거나 빵 사이에 두둑이 채워 샌드위치로 즐기기도 한다.



한 무더기 쌓인 당근 앞에서 크게 한숨짓다가 기꺼운 마음으로 당근 라페 레시피를 따랐다. 아이들 용은 통겨자를 빼고 만들었다. 익히지 않은 당근채가 각종 소스에 숨이 죽어 한결 부드러워졌다. 당근 라페, 기력이 달리거나 입맛 잃은 날, 혹은 불 앞에 서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철에 입맛을 돋울 메뉴로 픽!




당근을 기름에 익혀 먹는 걸 좋아한다.
당근을 기름에 익혀 먹는 걸 좋아한다.
당근과 양파를 3대 2 비율로 수프를 끓였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의 입맛을 고수하는 나는 당근을 기름에 익혀먹는 편을 선호한다. 당근을 기름에 볶거나 튀기면 그것이 본래 품은 흙맛과 풋내가 제거된다. 기름 없이 당근을  충분히 익히기만 해도 단맛이 깊어진다. 사소하지만 당근을 맛있게,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요리의 기본 원리라 본다.



기름이 노랗게 물들도록 채 썬 당근을 팬에 달달 볶는다. 기름에 익힌 당근은 김밥 속으로도 쓰고, 시금치나물이나 잡채에도 곁들인다. 작고 귀여운 당근은 올리브유를 골고루 발라 오븐에 통으로 굽는다. 굽는 내내 어묵 내지는 소시지 향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새삼 당근이 품은 감칠맛의 위력을 실감다. 최근에 당근과 양파를 3대 2 비율로 넣어 끓인 당근수프의 맛이 좋았다. 가끔은 당근을 넉넉한 기름에 튀기듯 구워 부침개처럼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정식 명칭으로는 '당근 뢰스티'라 부른다는 걸 요 근래 요리책을 보고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당근과 호박의 조합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뷔페에서 맛본 단호박 샐러드였는데, 으깬 호박 사이사이로 선명한 주홍빛의 당근 다짐이 단호박 노란 빛깔을 더욱 먹음직스럽게 돋우고 있었다. 원래 보통의 키라도 키 큰 친구 옆에 서면 그 키가 훌쩍 커 보이는 법이다. 그날 단호박이 꼭 그랬다. 당근과 단호박의 콜라보, 맛의 조화 또한 훌륭했다. 부드럽고 포슬한 단호박 버무리 사이로 어쩌다 살캉하게 씹히는 당근의 식감이 근사했다.



당근과 호박을 1대 1로 넣어 끓인 죽의 색깔이 곱다



그 뒤로는 죽을 끓일 때마다 꼭 당근과 호박을 같이 다룬다. 늙은 호박이 제철인 가을에는 당근과 호박을 1대 1 비율로 쓴다. 더디게 익는 당근을 고려해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조리한다. 푹 끓어 익은 재료를 믹서로 갈고 가는 불씨에 냄비를 올려 시간을 잊고 둔다.(물론 가끔 저어준다.) 당근 풋내가 사라지면서 단맛이 깊이 우러난다. 늙은 호박과 당근이 합일을 이루며 만들어 낸 선홍색이 질투 나도록 곱다. 늙은 호박이 가진 본연의 맛에 당근의 단맛이 더해진 맛 농염하다.


   



국산 단호박이 귀한 5월, 가까스로 생협에서 조생종 미니단호박 하나를 구해 왔다. 조생종 단호박은 팍신한 질감에 씹을수록 은근한 단맛이 도는 밤맛 나는 품종이다. 이 귀한 호박을 당근과 반반 섞어 죽을 끓였다. 믹서로 갈지 않고 매셔로만 으깨 포근포근한 호박 과육과 외피, 쫀득한 당근 알갱이 씹는 재미를 살렸다. 단호박의 껍질마저 부드러워 벗기지 않고 그대로 조리했더니 꼭 내장 풀어 끓인 전복죽 빛깔이다. 보양식을 먹는 기분으로 한 술 한 술 떠 본다. 땅의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식재료를 알아가는 일이 작은 도전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당근 같이 잘 안다고 여겼던 식재료조차 그것의 새로운 활용에 눈을 뜰 땐 인생이 새롭다.


어쨌거나 당근의 몸값은 크게 뛰었고 나는 오늘 미처 처리하지 못한 당근으로 착즙주스를 만들려고 한다. 걸러진 당근 섬유질을 활용해 내 식대로 당근 머핀을 구워볼 예정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차근차근 당근을 알아간다. 어쩌면 이런 게 인생의 맛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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