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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un 16. 2023

머위, 어른의 맛

낯선 식재료 마주하기

낯선 식재료를 마주하는 일은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만큼이나 어렵고 조심스럽다. 굳이 '올리브(Olive)' 같은 전문 요식잡지를 화려하게 수놓 이국 채소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언젠가 먹어봤음직한, 그러나 손수 다뤄본 적 없는 식재료라면 그것은 내겐 여전히 낯선 재료다.



생소한 생김과 질감, 풍기는 향기조차 익숙지 않은 식재료를 조리에 활용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용기마저 필요하다. 결국 용기를 낼 수 있는 건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서 언젠가 한번 맛보았다는 자이다. 더듬더듬 길을 찾다 보면 몸속 세포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그날의 맛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기억 속 맛의 지평을 넘어 의외의 황홀 지경에 이를는지도. 그런 작은 희망을 품고 조심스레 맛의 순례를 떠난다.       





머위야말로 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식재료 중 하나였다. 친정 엄마로부터 머위대 몇 줌을 받아보았을 땐 적잖이 놀랐다. 이렇게나 뻣뻣하고 투박해 뵈는 한낱 식물의 줄기가 음식이 되어 밥상에 오른다고? '머위'라는 이름만은 귀에 익지만, 눈앞에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한 건 처음인 데다 다루기가 영 험해 보였다. 주눅 든 마음에 레시피조차 찾아볼 염두가 나지 않아 친정 엄마의 도움을 구했다. 찬찬한 설명을 듣고 나니 그제야 해볼만 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억센 머위대는 무조건 부드럽게 만들고 볼 일이었다. 큰 냄비에 넉넉히 물을 붓고 소금을 한 스푼 넣어 머위대를 푹 익혀 냈다. 데친다기보다는 삶는다는 표현이 옳았다. 머위가 익어감에 따라 햇감자 풋내가 진하게 올라왔다. 익숙한 내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잘 삶아져 투명해진 머위대가 몰캉하게 만져졌다. 뜨거운 머위대를 찬물에 헹구 그것의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집어내니 껍질이 술술 벗어졌다. 거칠고 드센 식재료가 손끝에서 고분고분해지는 걸 경험하는 일은 주방을 지키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재리라.





손질한 머위대로 국을 끓였다. 멸치육수를 진하게 우리고 들깨가루를 풀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국물이 가진 여유를 뚫고 머위대 특유의 맛과 향이 뒤끝 있게 올라온다. 정확하게 단짠(달고 짠 맛)을 비켜가는 맛이다.  쌉싸래하면서 화한 맛의 기세가 청명하게 속을 훑는다. 대번에 입과 속이 개운해지면서 몸이 정화된다. '맛이 있다'거나 반대로 '맛이 없다'라고 평하기 어려운 맛. 굳이 말하자면 깊이 잠들어 있던 몸속 세포들을 일일이 깨워 내는 매혹적인 맛. 이처럼 어린 날에 맛본 '대수롭지 않은 맛', '혹은 가까이 하기 어려운 맛' 을 롭게 감각하게 되는 날엔 어쩐지 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 새벽시장에 가면 집집마다 장아찌를 담근다고 머위대가 불티나게 팔린단다. 처음부터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SNS 세상 속 입소문보다  도 발 빠른 시골 어매들의  트렌드를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국거리나 나물 무침용으로 쓸 때와 달리 머위대를 3분가량 짧게 데쳐 준비했다. 재료의 아삭한 식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 단촛물의 비율은 진간장: 식초: 물: 소주: 설탕= 1: 1: 1: 1: 0.5로 잡았다. 소주를 적당량 첨가한 덕으로 단촛물을 끓이지 않아 수월했다. 나의 머위대를 향한 맛의 순례는 그렇게 장아찌를 두어 통 담그는 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그 나물에 그 반찬'이란 말에서는 어쩐지 지루하고도 서글픈 주방 일상의 애환이 묻어난다. 늘 같은 자리에 서서 새로운 대상을 향한 호기심이나 어떠한 참신한 시도 없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이어가는 어떤 이의 애달픈 삶이 그려진다.



익숙한 것은 대체로 손쉽다. 그렇게 주어지는 편의와 안락에 주저앉않으려 낯선 식재료를 기꺼이 마주한다. 몸에 익은 방식을 으려는 주부 생활의 관성을 깨기 위한 작은 몸부림쯤 될 것이다.



인간관계라고 크게 다를까. 주부로 살아가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 조심스럽다. 의기소침한 마음에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에 머물며 자주 웅크린다.



지근지근 머위대를 씹으며 생각한다. 처음 이에게 선뜻 다가서기 어렵지만 내편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보면 생각지 못한 선한 관계의 지평이 열릴지 모른다. 으로는 나도 그(그녀) 궁금해 하잖아. '그는 어떤 사람일까. 개성이 도드라져 보이지만 조금씩 가까이하다 보면 나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어떤 면에서는 나와 아주 잘 통하는 사람일런지도.' 



익숙함과 손쉬움을 깨고 한 발 앞으로 성큼 나아갈 것. 이런 작은 다짐으로 마음의 창문을 조금 크게 열어 둔다. 두 평 남짓 주방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게도 새로운 일의 시작이, 어떤 귀한 만남의 기회가 불쑥 찾아올지 모르니까.



오늘, 어제보다 조금 나은 어른이 되어 그렇게 나의 작은 주방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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