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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Dec 08. 2023

커피값을 벌기로 했습니다

계속 쓰고 싶다는 바람

두 권의 책을 연이어 내면서 얼마간 복에 겨운 시간들을 보냈다. 글로 세상과 연결되면서 독자라 불리는 다정한 이들을 만나 마음의 교감을 나누었던 것, 내 일생을 통틀어 그만큼 값진 경험은 없었다. 존재 자체가 작고 미미한 나로서는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한 크고 과분한 사랑이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으나 진심을 다해 살아낸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의 문턱에 가닿고, 되려 그것이 명랑한 메아리와 더 깊은 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일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다. 쓰지 않았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기쁨이요, 어쭙잖게 시작한 문장일지언정 마침내 그것의 마침표를 찍은 저자 자신이 누릴 오롯한 보람이기도 했다.



그것으로 충분해야 했다. 여전히 쓸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하며 삶의 문장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말이다. 그럼에도 한동안 출간 후유증을 앓았던 건 기분 좋은 소란이 다녀간 뒤 아무것도 달라진 바 없는(없다고 느낀) 일상 탓이었다. 책이 나온 뒤 일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여느 출판사나 잡지사, 혹은 어떤 단체로부터 기고나 강연 의뢰가 온다던지 하는, 책을 내기만 하면 자연히 따를 거라 여겼던 흐뭇한 일들이 내게는 없었다. 출판으로 인한 소란과 흥분은 오래지 않았고 나는 다시 제자리였다.



인세라도 두둑이 챙겼더라면 마음의 헛헛함이 덜했을까. 출판 계약과 동시에 선인세 백만 원을 받을 때만 해도 글쓰기가 수입으로 연결되리라는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인세 명목의 금액이 계좌에 찍히기를 번, 돈의 액수가 큰 보폭으로 줄어들더니 그마저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세상에 막 모습을 내보인 내 책의 존재 가치마저 그렇게 슬그머니 사그라드는 건 아닐까, 남모르게 애를 태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 글쓰기에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던 것 같다. 책 쓰기의 의미와 가치를 외적 보상에 두자면 심사가 크게 뒤틀렸다.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문장과 씨름해 봤자 최저시급조차 나오지 않는 이 부당한 노동의 현장을 누구에게 고발할꼬, 답답한 가슴을 쳤다. 편의점 계산대를 한 시간만 지키고 서있어도 9,620원이 떨어지고 아이들 학교에 가서 점심 급식만 퍼줘도 시급 12,000원은 나오는데. 이런 식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논리를 늘어놓으며 저 자신을 괴롭게 했다.



무언가를 써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쓸 수 없는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즐거움으로 시작했던 글쓰기는 어느새 버거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마감을 종용하는 이 없건만 자신만은 스스로를 채근했다. 한 치 앞길도 보지 못하는 채로 지금껏 해왔던 일을 꾸역꾸역 해내려 들었다.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난 난관이었다. 내 앞에 놓인 이 커다란 걸림돌을 성큼 뛰어넘고 싶었다. 그날로부터 나는 묻기 시작했다. 나는 무얼 위해 써야 하는지, 쓰는 행위란 과연 무엇을 남기는 일인지를 묻고 또 물어야만 했다.  





처방 삼아 몸 쓰는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단순히 산책 시간이 부족하다던가, 운동량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몸을 부리는 일로 치자면 매일의 집안일을 감당하기만도 벅찬 상황이었으니까. 다만 보다 선명한 목표 아래 적극적으로 몸을 놀려 머릿속 잡념과 내면의 부정적인 기운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태자면 커피값만큼은 제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나에게 커피는 글쓰기의 은유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하루 중 커피 한 잔의 기회를 글쓰는 시간을 위해 남겨두는 편이다. 가장 좋아하는 일에 또 하나의 좋아하는 것을 얹어 그 시간을 더욱 각별하게 만들고자 함이다. 주로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가끔 집에서 핸드드립을 내리자면 커피 비용은 꾸준히 지출된다. 말하자면 커피 한 잔에 치르는 값은 하루치 글쓰기를 가능케 하는 투자이자 최소한의 연료가 되는 셈이다.



와인빛깔 탐스런 액체를 홀짝거리며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 글줄을 붙들고 씨름하던 숱한 시간들. 의미 있는 무언가를 생산치 못하고 소비만 일삼으며 하루, 또 하루를 흘려보내나 싶어 끝내 주눅들고 마는 마음. '오늘도 하릴없이 커피값만 축내며 앉아 있구나'하는 극한의 생각으로 치닫던 날의 괴로움이란. 스스로를 갉아먹는 몹쓸 자괴와 무력감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만 했다. 커피값만이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매일의 쓰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하루 한두 시간, 머리를 비우고 몸을 쓸 수 있는 일거리를 찾기로 했다. 지금처럼 살림을 전적으로 돌볼 수 있고, 아이들에게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일. 몸의 에너지를 완전히 바닥내지 않으면서도 어떠한 사전 준비나 마음의 대비 없이 선뜻 시작할 수 있는 일.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일로 청소 알바를 떠올렸다. 학생 때 용돈벌이로 과외 알바를 이어가다 곧장 교단에 올랐던 사람. 교사를 그만두고 주부가 되어서는 작은 살림을 꾸리며 소박한 글을 쓰는 게 낙이 된 사람. 그런 이에게 집 아닌 다른 장소에 가 빗자루를 드는 일이란 가슴 떨리게 긴장되는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를 결심하기까지의 모든 상황은 글쓰기를 꾸준히 이어가는 일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사실의 방증인지 몰랐다. 지독한 앓이 끝 얻은 한 가지 소득이라면 삶에 어떤 변화를 주어서라도 계속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 바로 그 절실함을 알아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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