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D-7, 냉장고와 팬트리를 비우다
귀국일이 바짝 다가오면서 마침내 주방 살림의 목적이 '비움'이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트를 도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냉장고와 팬트리는 비워질 틈이 없었다. 냉장고는 구비해 둔 식재료가 채 소진되기도 전에 새로운 먹거리로 채워졌다. 팬트리는 식료품 방치의 공간이었다. 가루류나 파스타면 같이 상대적으로 유통기한이 긴 식품들을 값이 저렴할 때 사 쟁여 두고는 '언젠간 해 먹겠지' 미루기 일쑤였다.
비행기 탈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식료품 소진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옷가지며 다른 생활용품 정리와 달리 식료품 처리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치밀한 조리 계획 하에 꾸준히 재료를 소진하면서도 끊임없이 외식과 소비의 욕구에 맞서야 하는, 그것은 고난도급 비움 실전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한 가지 음식을 만들려면 있는 식재료에 두어 가지 새로운 재료를 덧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냉장고 속 깻잎을 보니 매콤한 제육볶음 생각이 간절해진다. 마트로 달려가 돼지고기를 1Lb(453g)쯤 사 온다. 제육에 쓰고 남은 고기 양이 어설프다. 그걸 김치찌개에 넣어 끓이면 맞춤일 것 같다. 그런데 두부가 없다. 두부 없는 김치찌개는 영 허전한데 이를 어쩌나... 나는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는 식재료의 순환을 보며 인간의 먹고사는 일만큼 질기고도 끝없는 굴레가 또 있을까를 생각했다.
비우고 비워도 도무지 비워지지 않는 건 내 마음인지 몰랐다. 이곳에서의 삶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냉장고 앞에 서서 무슨 요리를 해볼까 궁리하고, 구미에 당기는 채소 과일을 당장이라도 사다 채워 넣는, 그렇게 이어오던 일상을 계속해도 될 것만 같았다. 그 마음은 남은 생에 대한 집착과도 같이 강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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