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분신처럼 지니고 있던 줄넘기가 뚝 끊어졌다. 고등학교, 아니 어쩌면 중학교 시절부터 써왔을 지 모르는 거니까 20년도 더 된 줄넘기였다. 사건이 있던 날, 평소대로 줄을 넘는데 이상하리만치 자주 줄이 바닥에서 튀고 또 발에 걸리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자세에 더욱 신경을 써가며 줄을 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양손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궤도를 이탈한 줄이 두 손을 축으로 제각각 허공을 구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확히 줄의 가운데 지점이었다. 줄이 끊어진 곳 부근은 이미 헤질대로 헤져있었다. 아마도 나도 모르는 새 줄은 서서히 마모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줄넘기 줄이 끊어질 수도 있는 거로구나. 기가 막히면서도 순간 뜻 모를 성취감이 몰려왔다. 이게 뭐라고 메달을 따낸 선수 마냥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부턴 어떡하지. 익숙해져서 이만한 줄넘기가 없는데.' 어디 가서 똑같은 줄넘기를 구해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나 매끄럽게 잘 깎인 원목 손잡이에 가죽 비슷하게 짱짱한 줄이 달린 줄넘기를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을 지켜본 지인은 손잡이는 버리지 말고 두었다가 줄넘기 잘 다루는 곳에 사후 서비스(as)를 맡겨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비슷한 재질의 줄을 원목 손잡이에 이어 줄 지 누가 아느냐면서. 결국 어찌해야 하나 고민만 하면서 하루 이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실은 '이쯤 돼서 조금 쉬어도 되는 것 아니냐'라고 속마음이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 집 남매가 태권도장 줄넘기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도장 자체에서 개최한 줄넘기대회로 평가는 관악구청장 기준표에 준하여 진행되었다. 평가 종목은 30초 빨리뛰기로 오른발, 왼발을 각각 한 번씩 뛰는 것(2번 뜀)을 1회로 쳤다. 초등 1부는 30초 안에 40회 이상, 초등 3부의 경우 50회 이상을 뛰어야 1위 자격을 얻는, 쉽지 않은 기준이었다. 올해 3학년이 된 첫째 아들은 30초에 52개, 1학년 둘째 딸아이는 무려 56개의 줄을 넘어 각각 급수별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수상 선물로 연두색 김수열 줄넘기를 당당히 받아들었다.
밴드에 공개된 줄넘기 대회 동영상을 보니 딸아이의 줄 넘는 자세가 평소와 달랐다. 지나치게 팔을 벌리고 뛰느라 에너지 소모가 커 보였다.
"왜 이렇게 팔을 많이 벌리고 뛰었어? 힘들었을 텐데."
"아, 엄마, 도장에 있는 줄넘기가 다 길어서 그랬어."
"세상에, 우리 OO 키에 맞는 짧은 줄넘기가 없었던 거야? 너무 했네."
줄 길이가 신장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해 줄을 넘은 것이었다. 실상 30초 안에 번갈아뛰기 56개를 넘은 것은 전체 초등부를 통틀어 최고의 기록이었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꼬꼬마가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당당히 기록을 세운 것이 놀랍고도 기특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워낙 어려서부터 줄을 넘는 엄마 옆에서 줄을 가지고 논 아이들이다. 어설프게 줄 하나를 넘고, 또 하나의 줄을 넘고... 아이가 줄을 넘는지, 줄이 아이를 넘는지 자세가 하도 우스꽝스러워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렇게 천진하게 몸으로 터득해온 줄넘기로 또래 아이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걸 보면 역시 줄넘기의 세계란 무서우리만치 정직하구나 싶다.
맞아, 연장이 문제가 아닌 걸. 삶을 대하는 내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줄넘기 루틴을 떠올렸다. 피곤해도, 무기력한 순간에도 줄을 넘으면 기적처럼 몸과 마음이 다시 깨어나곤 했었는데. 꾸역꾸역 줄을 넘고 나면 신기하리만치 삶의 의욕과 용기가 새롭게 솟아나곤 했던 것이다.
겨울 끝자락, 일기가 말할 수 없이 찬 날이었다. 입춘이라지만 계절은 더욱 오기를 부리는 모양이었다. 집에 뒹구는 플라스틱 줄넘기를 손에 감고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오랜 기간의 휴지기로 몸도 마음도 둔해져 있었다. 벌을 받는 기분으로 줄을 넘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줄넘기는 언제부터고 하나부터다. 목이, 어깨가, 다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감각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걸리고 넘고, 걸리고 또 넘고, 숨이 차면 쉬어가면서 얼추 천 오백 개의 줄을 넘었다. 식은땀 같이 다소 서늘한 땀이 몸이 배어났다. 갱년기를 앓는 사람처럼 한기와 온기가 동시에 오갔다. 몸살을 앓고 난 후처럼 몸이 개운했다. 오랜 숙제를 비로소 끝낸 기분, 뭐랄까 묵은 변을 한 번에 해결한 듯 상쾌했다.
아이들은 이번 대회에서 선물로 받은 줄넘기가 '안 꼬이는 줄넘기'라며 기뻐했다. 아무래도 관장님께서 상품으로 '안 꼬이는 줄넘기'를 내걸고 아이들의 사기 진작을 해오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평범한 줄넘기였다. 오히려 손잡이는 아이들이 잡기에 지나치게 긴 감이 있고 줄도 보통 줄넘기 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우연한 기회에 관장님을 만나 '안 꼬이는 줄넘기'의 정체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관장님, 애들 말로는 이번에 주신 줄넘기 줄이 '안 꼬이는 줄넘기'라는데요."
"하하, 어머니. 별건 아니고요, 아이들 키에 맞게 줄 조절하시잖아요. 남은 줄을 베베 꼬아서 손잡이 안으로 밀어 넣지 마시고요, 가위로 싹둑 잘라주세요. 그럼 안 꼬여요."
"아, 그런 거였어요? 실은 제가 줄넘기를 새로 사야 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줄이 잘 안 꼬이는 어떤 줄넘기 브랜드가 있나 하고 여쭤본 거예요. 애들 키 클 거 생각해서 보통은 그렇게 줄 조절하는데 좋은 팁이네요."
그 길로 돌아와 집에 있는 플라스틱 줄넘기를 내 키에 맞도록 조정했다. 손잡이 안으로 말려들어간 잉여의 줄을 보기 좋게 싹둑 잘라냈다. 줄넘기 줄 타령만 할 게 아니라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