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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말 Apr 27. 2022

델픽 : 차가 건네는 망각의 즐거움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내가 최근까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오늘의 몸과 마음이 말하는 것을 무시한 채 일에만 과하게 시간을 보냈더니 삶의 밸런스가 깨졌고, 거기서 오는 무력감을 회복하는 요즘이다.

 

 그럴 때 방문했던 델픽은 나의 무력감을 잠시 잊게 해 준 망각의 공간이었다. 함께 마신 차는 무수히 떠다니던 삶에 대한 고민들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온 감각을 지금 느껴지는 차의 향과 맛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계동의 풍경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델픽(DELPHIC)

 2020년 12월, 유수진 대표가 론칭한 국내 티 브랜드이다. 델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삶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이 신에게 조언을 얻고자 만든 신탁(델픽)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델픽의 차 한잔을 통해 삶 속의 균형을 발견하여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예술과 함께하는 차 문화를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종로구 계동에 오프라인 공간을 열어 함께 운영하고 있다. 1층에는 뮤지엄헤드, 2층은 델픽 티 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브랜드 영감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델픽은 고대 그리스 시대 ‘신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삶에 균형을 잃었다 느껴질 때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델픽의 차 한잔을 통해 인생의 해답을 찾아내길 바라는 마음을 브랜드로 담아냈다. 


 이 모티프는 델픽 제품과 공간 등 시각적인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차 보관 틴케이스와 티백 박스를 보면, 차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펜슬 스케치 형태로 그려내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테이크아웃 종이컵과 티백 태그에도 그리스 벽화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이미지가 곳곳에 디자인되어 있다. 델픽 로고에도 그리그 신전이 있다. 이러한 시각적인 부분들이 모여 고대 신화의 신비로움을 더 부각시킨다. 

왼쪽부터 델픽 티 틴케이스, 티백 박스, 티백 태그 그리고 델픽 로고 ⓒ델픽



누구나 

최고의 차를 

즐길 수 있도록


 델픽은 차 문화 속에 오랜 시간 자리 잡고 있는 동서양의 구분이나 다양한 다도의 격식과 같은 경계를 넘나 들며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차 문화를 지향한다. 블렌딩 형태의 시그니처 티부터 단일다원(單一茶園, Single Estate)*형태로 수확한 프리미엄 티까지 개인의 취향과 기호를 델픽을 통해 찾아가며 자신 만의 차 문화를 완성해 나갈 수 있다.

*단일다원(單一茶園, Single Estate): 오직 한 차밭에서 같은 시기에 수확한 찻잎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차밭과 다른 지역의 찻잎이 섞이지 않기에, 각 지역과 차밭만의 고유한 성질을 간직하고 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생산하고 수확기간이 아주 짧으며, 그중에서도 향미가 뛰어난 차를 선별해 유통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매우 적은 게 특징이다.


 나의 경우 차에 대한 '벽'이 있었다. 차는 연령층이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라 생각했고, ‘다도(茶道)’라는 단어에서 오는 묵직한 느낌이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리고 커피 애호가인 내게 차의 맛은 다소 밋밋했다.


 델픽에서 시도해본 차는 Fig. 1(피그 원)이다. 루이보스 차 계열인데 무화과, 사과, 카카오 쉘 등이 블렌딩 되었다. 첫맛은 무화과 향이 먼저 올라오는 독특한 맛(차를 접해본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이다)이었다. 그다음 커피에서 느껴지는 고소한 맛이 올라와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마셔도 이질감이 적었다. 향은 달지만 고소하며 약간의 쓴맛도 느껴져 전혀 밋밋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피그 원 티백을 구매했다.(웃음)


 델픽은 티 문화가 발달한 영국에서 오랜 기간 연구한 국내 티 마스터와 23년 경력의 해외 티 전문 연구진 들과의 합작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스페셜한 블렌딩 레시피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유수진 대표도 티 마스터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어 차의 콘셉트부터 제품 연구 및 개발까지 직접 참여하고 있다.



예술과 차의 

경계를 넘나들다


 델픽은 동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차와 함께 즐기길 바란다. 그러한 브랜드 철학은 건물 공간에서부터 시작된다. 1층은 '뮤지엄헤드'라는 비영리 형태의 전시공간이 자리 잡았다. 뮤지엄헤드는 '뮤지엄'에 '광'적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미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렇듯 뮤지엄헤드는 차별 없는 공간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혀버린 당연한 생각들을 경계한다. 뮤지엄헤드를 통해 현재 시급하고 문제적인 것을 조명하고 탐구하는 작가들과 협업하며, 이들의 작업을 지원, 소개하는 전시와 출판,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2021년 가을, 게이 작가 아홉 명과 함께 성 정체성을 다룬 전시와 올해 3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열린 여성에 관한 전시 <말괄량이 길들이기>처럼 쉽게 꺼내기 어렵지만 반드시 다뤄야 할 시의성 있는 주제를 예술로 풀어내는 것이 뮤지엄헤드가 추구하는 전시의 방향성이다. 


 이러한 노력은 경계 없는 것을 지향하는 델픽의 브랜드 철학과 연결되며, 파인아트를 전공한 유수진 대표이기 때문에 지켜질 수 있는 전시 철학으로 보여진다. 

1층 뮤지엄헤드에서 열리는 다양한 전시 ⓒ뮤지엄헤드



델픽과 함께하는 

차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2층 델픽의 오프라인 공간은 카페라기보다 또 하나의 전시 공간과도 같았다.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다구(茶具)들이 작품처럼 진열되어있으며, 이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델픽은 차뿐만 아니라 델픽과 어울리는 다구도 함께 판매하고 있다. 인상적인 점은 공예작가가 직접 만든 다구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자체가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티팟&저그, 티컵&티보울부터 트레이, 커트러리까지 다양한 다구들이 공예작가의 손을 통해 탄생했다. 다구를 모으면서 내 손안에 뮤지엄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공간은 카페 공간으로 델픽의 차를 즐길 수 있는 메뉴와 디저트가 구성되어 있으며, 차를 만드는 공간을 두르는 바 형태로 좌석들이 배치되어있다. 테이블은 이게 전부다. 카페를 통해 수익을 내고자 했다면 이 구조는 유휴공간이 많은 비효율적인 배치다. 하지만 차를 만드는 과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조이며, 차에 대한 설명을 듣기에도 좋은 경험 설계라고 생각한다.


 델픽의 공간은 유수진 대표의 추억도 함께 쌓여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을 설계할 때 더 정성과 진심을 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좋은 공간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게 느껴지길 바랄 테니까. 또 하나의 끝장 포인트는 바로 옥상이다. 옥상에서 보는 계동의 전경은 정말 장관이다.

2층 델픽 티 하우스 ⓒ델픽, 네이버디자인



델픽의 

페르소나는 저예요


 HFK 커뮤니티 멤버의 도움으로 유수진 대표와 캐주얼한 인터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이 델픽의 페르소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유수진 대표는 바로 자신을 페르소나를 삼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뾰족하게 브랜드를 설계를 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 갈증을 느꼈던 부분을 브랜드로 구현시켜 이를 공감하는 사람들과 가치를 향유하는 것. 무엇보다 강력한 브랜드 자기다움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수진 대표 말에 의하면 초기 오프라인 공간의 경우, 제품과 공간이 주는 시각적인 매력 때문인지 본인이 설정한 페르소나보다 젊은 층이 더 많이 방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페르소나를 보완해야 하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 요즘 자신과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도한 방향대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앞으로 델픽은 현재 도매 형태로 납품 중인 채널들을 좀 더 다양하게 확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커피 원두를 도매 형태로 타 업체에 공급하고 있는 프릳츠처럼 말이다. 그리고 차 문화는 물론 리빙 영역도 어떻게 델픽만의 색을 입혀 접근할지 계속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델픽의 차를 통해 나는 충분한 망각의 즐거움을 느꼈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잡념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현재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들이 차올랐다. 


 델픽을 보며 감정을 자극하는 브랜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사람의 감정에 깊숙이 관여한 브랜드는 기억에 더 오래 남기 마련이다. 감정은 의식 기반의 행동보다 더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나타나는 게 감정이고 그럴 때마다 감정에 깊이 엮인 브랜드는 계속 상기된다. 감성지능이 좋은 브랜드라면 단순히 구매 유도를 넘어 브랜드에 대한 인식 전환은 물론 충성도까지 높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스몰 브랜드라면 뾰족한 브랜딩과 제품의 기획 단계부터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를 함께 설계해보는 것도 장기적으로 볼 때 투입 비용 대비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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