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말 May 12. 2022

하이퍼로컬로 돌아온 동네 마켓

지금 우리 동네는


 노란 장판이 깔린 평상, 빨주노초 알알이 쌓인 캡슐 뽑기, 목욕탕에서 본 나지막한 플라스틱 의자에 웅크려 앉아 대결했던 미니 게임기, 그 옆에 아이스크림 냉장고. 그것들을 지나 달그락 소리 내는 철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테트리스 조각들이 서로 맞물린 것 같은 화려한 포장지에 싸인 제품들이 쏟아질 듯 나를 바라봤다.


 슈퍼마켓을 오래 배회하고 있으면 엿들을 수 있는 아주머니들의 수다 삼매경. 그냥 심심찮은 사는 이야기일 뿐인데 엿듣고 있자니 더 재밌게 들린다. 등굣길에 있던 그 슈퍼마켓은 나에겐 뿌리치기 힘든 세이렌의 유혹 같았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하고 친절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매장에 가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하면 제품 정보가 나오고, 친구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더 자세히 알려주는 사용 꿀팁 영상이 있으며, 온라인에서 장을 보면 당일 제품이 배달 온다. 그리고 대형마트들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끝도 모르게 쌓여있다. 


 그렇게 동네 켓은 점점 사라지는가 싶더니 하이퍼 로컬(Hyper-local)*이라는 이름과 함께 돌아왔다. 예전 슈퍼마켓과 공통점이 있다면 이웃들의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 다른 점은 모든 물품을 취급하는 만물상이 아닌 마켓 주인의 안목으로 선택된 물품들만 모여있다는 것이다.

*하이퍼 로컬(Hyper-local)은 ‘아주 좁은 범위의 특정 지역에 맞춘’이라는 의미로, 슬리퍼와 같은 편한 복장으로 각종 여가·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권역을 뜻하는 ‘슬세권’과 비슷한 말임





보마켓(BOMARKET) :

와인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이것과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2014년 한남동 남산맨숀 1층에서 시작한 보마켓은 아름답고 유용하고 맛스러움을 지향하는 동네 마켓이다. 현재까지 총 4군데(서울숲, 경리단, 서울로, 남산 부근)에 매장이 있으며, 식자재, 잡화, 서적 등 다양한 제품을 큐레이션 하여 제공하고 있다. 동네에 특성을 고려하여 매장마다 콘셉트와 취급하는 제품이 다른 것이 주요 특징이다.
보마켓 서울숲점 외관 ⓒ노말


 보마켓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다양한 색들이 반긴다. 특히 보마켓의 상징인 캠브로 무지개색 트레이가 진열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네트백, 치약 등 컬러 시리즈 형태의 제품들이 차례로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매장의 메인 컬러인 에메랄드는 그 화려한 컬러감을 품는 따뜻한 느낌을 준다. 


 보마켓의 유보라 대표는 자신이 써보고 좋은 물건을 고르고, 제안하며 고객의 반응을 살펴본다고 한다. 선택한 식료품과 와인, 키친 웨어, 주방 소품, 잡화 등을 통해 동네 생활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파스타 제품 진열 공간엔 좀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파스타의 모든 이야기가 담긴 매거진과 커트러리가 함께 진열되어있다. 친환경 제품 진열 공간에는 제로 웨이스트와 관련된 서적이 함께 진열되어있다. 그렇게 대상 제품과 관련된 생활양식 정보를 한 공간에 담아 경험 소비가 가능하도록 구성하였다.


“제가 직접 써보고 좋은 것들을 들여옵니다. 저는 예쁜 물건을 쓰는 걸 좋아해요. 치약 하나, 고무장갑 하나가 마음에 들면 그걸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칫솔 하나도 아주 고심해서 사는 편이고, 이렇게 발견한 좋은 물건을 소개하는 거예요.”

-Longblack 인터뷰 중-


 이국적인 제품 위주의 큐레이션*을 보면서 발견의 재미를 느끼다 보니 구매할 생각이 없이 출발했던 나도 노란 칫솔 꽂이와 솔트레인 치약을 사 왔다. 방문한 서울숲 매장 한켠에는 존쿡델리미트 제품들의 판매 공간이 있는데 샤퀴테리 가게처럼 하몽, 햄 등 다양한 부위의 소시지를 현장에서 소분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거대한 잠봉뵈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 큐레이션(curation)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집선별하고 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것을 말함본래 미술 작품이나 예술 작품의 수집과 보존전시하는 일을 지칭하였으나 최근  넓게 쓰임


 보마켓에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있어, 낮에는 브런치를, 밤에는 베리키친의 다이닝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로서란트*형태로 볼 수 있다. 지나가다가 혹은 산책하다가 가볍게 들려 간단하게 장을 보거나 이웃과 브런치를 함께 즐기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을 지향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식사와 장보기가 동시에 가능한 신개념 다이닝 트렌드로 미국에서는 식료품점을 뜻하는 그로서리(grocery)와 레스토랑(restaurant)을 합친 말

보마켓 서울숲점 내부 ⓒ롱블랙, 노말



생선씨 :

오늘의 신선한 해산물은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요

 이촌동에 있는 해산물 전문 그로서리 마켓. 매일 삼천포에서 아침에 잡힌 생선을 즉시 손질 후 진공 포장해서 당인 판매한다. 매일 생선 라인업이 조금씩 다르다. 매장은 작아도 금태, 참치, 군평선, 꽃돔 등 다양한 생산을 소량 포장하여 판매한다. 솜씨 좋은 어부들이 어획 즉시 선상에서 내장을 제거한 뒤 진공 포장하고, 뭍에 닿자마자 고속버스 편을 이용해 생선씨 매장으로 보낸다. 생선씨가 산지에서부터 중간 유통, 운송, 판매까지 모든 채널을 직접 찾고 관리하기 때문에 가능한 '당일 수확 당일 판매' 프로세스이다.
생선씨 가게 외관 ⓒ노말

 내가 알던 생선가게가 아니다. 공간이 크진 않지만 청결하고 깔끔하다. 회색 벽돌로 가게 앞을 감싸고, 인도 쪽 전면을 유리로 된 여닫이문으로 개방감을 주어 매장을 들어서는데 진입 문턱을 낮췄다. 생선이 진열된 매대는 오늘 넣은 것처럼 투명한 얼음이 바닥을 꽉 채웠으며, 생선들은 날것으로 그냥 올려진 것이 아닌 진공포장 형태로 진열되어있다. 수산시장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모던한 공간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직원 유니폼, 제품 포장지, 보냉팩 등에도 브랜딩이 되어있어 일관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곳곳에서 전달하고 있다.


 당일 수확한 신선한 생선을 판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알탕, 감바스, 젓갈, 샤퀴테리 제품, 와인, 치즈 등 해산물 밀키트와 해산물과 곁들이면 좋을 식자재들이 소량씩 진열되어 있다. 요즘 동네 마켓은 이게 매력인 것 같다. 메인 제품과 어울릴만한 식자재를 함께 파는 것. 제품만 단순 유통하는 것이 아닌, 사장님이 직접 제품을 경험하고 선택한 안목의 결과라는 것. 그 점이 잘 모르는 제품이라도 일단 신뢰하게 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사장님의 적당한 오지랖이다. 가게 앞에 사장님이 직접 나와있어 손님이 방문하면 오늘 올라온 생선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해주신다. 어떻게 요리해서 먹으면 맛있는지, 얼마나 신선 한 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주신다. 왜 동네 가게는 그런 맛이 있질 않은가, 소소하게 오가는 대화에서 오는 정감 말이다. 그리고 미리 요청하면 구매하는 생선을 추가 비용 없이 직접 구워주는 디테일까지. 집에 생선구이 냄새 배기 싫은 사람들의 취향도 저격한다. 


 이러한 다정함은 생선씨 인스타그램에서도 볼 수 있다. 매일매일 생선 소식과 함께 이벤트도 진행하다 보니 지역 주민 중심으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있는 가게이다.

생선씨 가게 내부 ⓒ노말



365일장 :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취향들이 거래되는 공간이 곧 시장이죠

 대한민국 최초의 전통시장인 광장시장이 만든 그로서리 마켓이다. '321Platform' 브랜드가 주축으로 새로운 시장의 경험을 제공하여 로컬의 가치를 높이고 역사를 이어 경제를 살리는 시장의 순기능을 새롭게 만들고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층에 위치한 365일장 뿐만 아니라 2층엔 음식들을 총괄하는 센트럴 키친이, 3층엔 사무실, 4층엔 와인바를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다. 기존 시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볼거리를 살리면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취향 가득한 제품과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365일장 가게 외관 ⓒ노말

 

 쨍한 초록색의 간판, 매장의 메인 컬러이기도 한 이 초록은 청량감과 싱그러움을 준다. 시장의 활력이 느껴지는 색감이다. 365일장은 젊은 세대만 겨냥한 게 아니다. 시장 상인들도 겨냥한 공간이다. 하루 장을 마감하고 이웃 상인들끼리 모여 와인 한잔하며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원했다고 추상미 대표는 말한다. 


류시형 COO는 “현재 전통시장은 없어지는 추세로 시장의 고유 기능을 잃는 중이라 생각한다. 이에 365일장은 전통시장과 상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전통시장과 상생하면서 발전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찾던 도중 나온 것이 365일장이다.”고 말했다.

-더 바이어 인터뷰 중-


 이것이 뉴트로*가 아닐까? 이전 세대가 지금 세대의 취향을 경험하고 지금 세대가 이전 세대의 정서를 공감하는 텔레포트 같은 공간이 365일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1층만 방문해서 아쉬웠지만 2층엔 식품 연구 개발을 연구하는 센트럴 키친이 3층엔 사무실 4층엔 '히든 아워'라는 와인바가 위치하고 있다. 

*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 과거의 흔적에서 새로움을 찾고 거기에 재미요소를 첨가해 현대적으로 즐기는 것을 '뉴트로 문화'라 함


 365일장은 문구 용품부터 가드닝 제품, 각종 와인과 전통주 그리고 차 등의 음료와 전국 로컬 제품까지 다양한 스몰 브랜드가 한 자리에 모여있다. 그래서 좋았다. 내가 모르는 특색 있는 스몰 브랜드를 발견할 수 있어서, 제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365일장이 기획한 PB(Private Brand) 상품과 광장시장 명물인 빈대떡의 가정간편식 버전도 있다. 전통시장의 특징인 소량 중심의 다양한 제품들이 모여있는 콘셉트와도 연결감이 있어 더 좋았다.


 가게 안쪽에는 전통시장 음식과 결합된 퓨전 요리를 경험할 수 있는 식사 공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는 카페로 리뉴얼되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 가보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전통 시장 음식을 얼마나 재해석했는지 궁금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365일장 가게 내부 ⓒ노말




 세 동네 마켓을 방문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감정은 설렘과 다정함 그리고 발견의 재미였다. 마켓마다 개성 가득한 셀렉 제품들을 통해 사장님의 안목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목적 없이도 가볍게 들려 구경하며 대화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 구성이었다. 오프라인의 장점인 오감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온라인은 편하지만 사람에게서 오는 다정함이 없다. 초연결 시대 속에 사는 우리는 고도화된 기술과 함께 편리한 일상을 보내지만, 그만큼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코로나가 심화되고 생활 반경도 좁아지게 되면서 그런 감정은 더 증폭된다. 이런 갈증을 오프라인 공간인 동네 마켓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신선하고 반가웠다.


 앞으로도 동네와 어울리는 취향과 이웃들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런 동네 마켓들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어글리어스 : 못생겨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