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다시 떠오른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하는 게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자식과 인간의 도리 그 어디쯤을 헤매다가 대꾸할 타이밍을 놓치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미래의 영화'를 위한 것이라 선전하며, 지금의 행복을 재물로 바치던 아버지의 지난 행위의 결과가 내 삶에도 침범했다 생각하니 점점 분해진다. 천천히 모아 나날이 만족하며 살았으면 좋았더랬다. 무엇이 아버지의 눈을 가린 것일까. 화가 사그라들지 않은 나는 다시 나와 내뱉어버린다.
"대학교는 갈 거예요."
배움에 대한 숭고한 목적보단 복수에 좀 더 가까웠다.
그렇게 마음먹고 3년째.
내 하루는 오전은 학교 수업, 오후와 저녁은 두세 개의 아르바이트로 흘러갔다. 아니 새벽까지.
어김없이 새벽, 에스프레소 5잔째, 책상에서 번역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드디어 쓸모가 생겼구나!’
대학교에서 외국어 하나 제대로 배워둔 나를 감탄하며 마지막으로 한 모금 마셨다. 3년 전 선택의 대가, 예상했다. 돈 버는 것에 애쓰는 나날들. 괜찮다. 그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대부분의 삶을 원망과 죄책감에 이질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겠지, 하하, 맞아 내 성깔에. 정신보다 육체가 괴로운 게 낫다며 타자를 마저 쳤다. 새벽 4시.
‘아씨, 오늘도 자긴 글렀다.’
너무 졸렸지만, 학교 시험시간이었다. 대충 챙겨 입고 나와 지하철에서 지난주에 녹음한 강의 내용을 들었다. 교수 목소리가 잔잔한 소음으로 다가와 정신을 자꾸 놓친다. 좌석에서 올라오는 히터의 온기는 눈꺼풀을 더 당겼다.
시험 2개를 치른 후,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에 남은 번역 일을 마저 해보려 서류를 꺼냈다.
‘이 건까지 납품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도 얼추 해결이다.’
잠시 희열을 느끼다가, 팔에 걸려있는 가방이 유독 무겁게 느껴져 자꾸 눈길이 갔다. 시선을 다시 돌리고 번역 서류를 보는데 글이 뿌옇게 보인다. 밤새서 그런가 싶어 눈꺼풀을 비비며 깜빡거린다. 다행히 오늘은 카페 아르바이트만 있으니, 일 끝나면 잠을 좀 잘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 아까부터 팔에서 스멀스멀 내려오는 가방을 계속 낚아챘다. 그러다 가방이 떨어졌다.
‘하아, 성가시네.’
주섬주섬 주워 다시 왼팔에 걸었다. 또다시 떨어졌다. 뭐야? 하며 팔을 만져보는 데 느낌이 없다. 다시 가방을 걸지만, 다시 맥없이 떨어지는 가방을 간신히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이상한데? 이상하다!’
일단 카페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병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병원을 가는 동안 감정이 올라오면서 막아놨던 생각들도 올라왔다. 쏟아지는 듯한 내 세계도 버거운데, 휩쓸려만 가지 않겠다 오기를 부려 대학 진학을 선택했었다. 그러니 타인의 세계까지 안을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공허함은 분명한 것들로 채웠다. 내겐 그게 돈이었고, 공허함이 클수록 돈으로 채우려고 애썼다. 그게 잘못인가?
접수하면서 증상을 말했더니 뇌질환센터 안내판을 가리켰다. 그 안내판 여러 단어들 사이에 '(중풍)’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서늘함을 느꼈다.
몇 가지 검사를 했고, 결과가 나왔고, 의사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셨는데 지금도 무슨 말을 하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공포만큼의 심각한 결론은 아니라 그냥 흘려보냈나 싶다. 과로라고 했었나?
병원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아직 뇌질환센터 안내판 앞에 멈춰있던 나를 깨웠다. 그리고 느껴지는 동네의 고요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하늘을 본 후, 중얼거렸다.
'내가 아버지와 다를 게 없네, 일단 아르바이트는 1개 줄이자.'
침침한 눈 때문에 더 아득해진 하늘을 보며 몇 번 더 피식거리며, 집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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