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시루 Dec 01. 2022

누구를 위한 백일인가

의례의 굴레

22년 12월 1일,

누구를 위한 백일인가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진 롤러코스터는 우리를  나은 어른이 되도록 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자체로 감사했다. 지난  , 행복으로 충만한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시간이 흐른 듯해 아쉽다.”


그럼에도  시점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있다. 지난 주말, 우리는 아이의 백일을 치렀다. 백일의 무게가 과거와 다르다 해도, 아이의 폭풍 성장을 보면 나름 의미가 있다. 아이뿐 아니라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우리도 격려받아야 마땅하다. 당초 우리는 백일 행사가  목적일 거라고 봤다.


우리는 백일이 가까워지면서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여러 연락을 받았다. 백일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그때 뭘 준비해야 하는지 등이다. 아이의 건강과 성장을 축복하는 부모님 마음에 감사했지만, 우리의 노고가 최우선 관심사가 아니란 데 실망했다. 우리가 그린 백일은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가 앞으로도 건강히 잘 자라길 함께 기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그린 손녀의 백일은 조금 달랐다. 여기서 외주 할 수 있는 소모적 노동은 논외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백일 OO" 등에서 터졌다. 각자 양가 부모님께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요청했건만 부모님은 백일 떡, 반지 등을 준비했다. 당일 행사에 가져오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자신의 지인들에게 줄 계획으로 이를 준비한 모양이다. 우리는 당황했다. 사실 부모님들만 아니면 백일 날 모여 사진 찍고 식사하는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냐면 출산 후 지금까지 가장 고생한 아내가 이 날을 위해 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가 건강히 잘 자란 데 감사하는 자리가 '조부모의, 조부모에 의한, 조부모를 위한' 자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혼 준비 때부터 우리는 의례(ritual)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만, 의례가 부모님을 위한 것이라면 과감히 생략하려고 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우리는 이에 공감하며 '예식 없는 결혼'을 계획했다. 그러다 주변의 회유 등 여러 장애물에 막혀 부모님을 위한 마지막 효도라 치고 결혼식을 '대충' 치렀다.


결혼 전, 소위 '정상가족'으로 불리는 형태의 가족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내겐 쉬운 결정이었다. 오히려 당시, 아내가 나와 같은 생각이란 데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 남들 다 하는 의례를 형식적으로 치르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그에 대해 고민하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이 같은 의례는 '아이 없는 삶'을 꿈꾼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이는 우리를 어렵게 키워낸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별개다. 우리는 단지 우리 방식으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은 소망은 관습에 의해 무참히 깨졌다.


우리 부부는 백일을 치른 당일, 모든 소품을 바로 치우고 곧바로 일상으로 복귀했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치른 백일은 그날 찍은 기념사진만 남겼다. 부모님은 "아이를 위한 건데 대충 하면 되겠냐"며 우리를 회유했지만, 이번에도 후회만 가득하다. 결혼식 후에 느꼈던 허무함은 이번에도 우리를 찾았다. 아이 키우는 데 하루를 쪼개 쓰는 우리는 재충전 시간인 주말을 완전히 날렸다. 백일을 무사히 넘기고, 우리는 다신 이런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했던 것과 같은 다짐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만의 착각인 게 금방 드러났다. 백일 행사를 하는 중 부모님은 돌잔치 얘기까지 했다. 돌잔치는 가족 친지를 모시고 하는 게 좋겠다는 등의 계획을 우리에겐 묻지 않고, 쉽게 말했다. 결혼식이 마지막일 거라고 했던 우리가 백일, 돌잔치로 고민하게 될지 몰랐다. 돌잔치 다음에는 또 뭐가 있을까? 앞으로 의무감으로 하는 가족 행사를 계속 잘 치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물론 우리는 가족 친지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있다). 부모님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과한 것일까? 아이를 위해 적어도 남들만큼 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들을 만큼 들었다.


남들만큼 살려고 보니, 오늘도 나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 채 하루를 보냈다. 아이가 태어나고 더 이상 '정형화된 삶'이 정답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살기 바라며 우리가 바라는 경로를 따르길 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 생각이 부모님께 닿으면 좋겠다. 아무리 말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찾은 타협점이 의례를 대충 치른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타협만 하다가는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고,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데... 언제까지 현실과 타협하며 의미 없는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짧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돌보는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