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잘 안다는 게 오만인 이유
23년 1월 13일,
오해를 너머 이해에 닿기까지
누군가를 잘 안다고 하는 건 오만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는 류시화 작가 말에 절대 공감한다. 사연은 이렇다. 10년 이상 알고 지낸 지인을 만났다. 한 때 같은 목표를 두고 함께 일한 터라 동질 집단에 속한다고 본 이다. 그러나 이는 내 마음대로 내린 잘못된 판단이었다. 발단은 커리어 얘기에서 시작됐다. 개인 커리어는 민감한 사안이라 대화 주제로 삼지 않는데 어쩌다 보니 얘기하게 됐다.
커리어는 개인사, 직장사 등이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라 논하기 어렵다. 나도 취업을 하고, 아내를 만나고, 또 아이가 태어나고 직장관이 바뀌었다. 여기선 앞선 얘기를 이어가기 위해 현재 내 직장관을 짧게 언급한다. 성장기에는 대학, 대학시절엔 취업을 목표로 살아온 난 앞만 보고 달렸다. 외적 성취와 별개로, 백 미터 달리기를 하듯 앞에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당장의 일에 진심으로 임했다. 누구나 이렇게 살았을 테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해보니 그 누구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합당하지 않았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서는 직장은 딱 돈벌이가 됐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직장은 누군가에게 자아를 실현하는 곳일 수 있다. 여전히 내 주위에는 직업인, 자연인 자아가 같은 이들이 많다. 나도 직장생활 초기 내가 쫓는 가치가 저편에 있다고 여기며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다. 물론 이 말이 현재 일에 충실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서서 일을 찾아 하는 건 자제하게 됐다. 어차피 일이 접근법에 따라 업무량과 성격이 달라져서다.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이 고사인 이유는 분명하다.
몇 주 전, 10년 넘게 알고 지낸 지인을 만나 일 얘기를 하던 차였다. 그는 나와 같이 일하다 수년 전 민간분야로 이직했다. 운 좋게도 비영리에서 영리 쪽으로 옮긴 경우였다. 현재 다니는 직장이 처음 이직한 곳은 아니다. 그는 여러 곳을 거쳐 현재에 이른 자신의 커리어에 나름 자부심을 내비쳤다. 난 직장이 뭐 별게 있냐며 고생 많았다고 했다. 다른 코멘트는 하지 않았으나, 그는 편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일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자신은 역마살이 껴서 여러 곳을 옮겨 다닐 팔자라며, 내겐 '회사 다 똑같다'며 한 곳에 오래 다니라고 했다. 내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이니 내겐 별로 와닿지 않았다. 마음 편히 회사를 다닌 시절이 있긴 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고, 또 현 직장은 커리어면에선 나가야 할 이유가 많은 곳이 분명해서다. 커리어에 대한 서로의 얘기는 여기서부터 부딪쳤다. 각자 '조직생활' 경험세계가 다르다는 점을 알면서도, 경솔하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한 셈이다.
여기에 이어진 그의 말은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는 솔직히 육아로 커리어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비전이 없으면 당장 연봉, 처우 등이 나빠도 ‘탈출’부터 해야 하지 않냐고도 했다. 또 아이를 봐서라도 경제활동을 오래 할 생각을 해야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건넨 말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아니 내가 더 잘 아는 얘기였다. 또 언젠가 내가 그에게 했던 얘기기도 했다. 조언을 가장한 참견은 부메랑처럼 돌아오곤 한다.
머리로는 알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 사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더 많다. 나이가 드니 마음대로 되는 일은 정말 손으로 꼽을 만큼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와는 오래된 사이고, 비교적 연락을 자주 하던 사인데도 대화는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재빨리 대화를 다른 주제로 넘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10여 년 전 내가 본모습, 그가 묘사한 직장과 결혼생활 등이었다. 아마 그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이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각자 먹고살기 바빠 서로의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며 이해할 수 없어서다. 또 옆에서 직접 겪어도 오해할 수 있는데, 각자 해석으로 채색된 경험담만 들은 것이니 '오차'는 클 수밖에 없다. 오차를 걷어내고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종교적으로 신을 경험하는 영적 체험만큼 어려울지 모른다.
내 경우를 봐도 육아를 기록하고 있지만, '문행 일치'가 안 되는 때가 많다. 글로, 또 머리로는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쓰고 그대로 행동하려고 하지만 그걸 놓치는 순간은 솔직히 빈번하다. 어쩌면 아내 출산을 전후로 쓰기 시작한 이 기록은 일종의 반성문일지 모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내 모습을 되짚는 기회가 돼서다. 아빠 역할을 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럴 능력도 여유도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지인과의 만남에서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마주할 것이다. 결혼을 하고 함께 사는 부부, 가족도 서로를 촘촘히 알기 어렵다. 누군가를 안다는 게, 그를 소중히 여기고 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관찰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여서다. 또 우리 모두는 가정, 학교, 회사 등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 일종의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른다. 어느 정도 본모습을 감추고 드러내고 싶은 면만 보여주는 '의도한 행동'을 하는 셈이다. 매 순간 개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본모습을 악의로 감춘다고 볼 수도 없다.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아마 평생의 일일 것이다. 잘 안다고 여긴 누군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절망은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감정이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을 같은 수준으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해서다. 나는 내 가족, 아내와 아이부터 더 열심히 관찰하고 이해하겠다고 다짐한다. 운명으로 맺어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걸 일생의 일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 오늘도, 오해를 너머 이해에 닿을 때까지 셋이 함께 할 시간을 소중히 보낼 결심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