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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걸음

쉬운 말 보다,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지

'이름'의 힘을 두려워해야 할 때 : 노 키즈 존

by 시루



“역시 결론은 똑같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이 번거롭기라도 해야 되는 것 같다.”

‘노 키즈 존’이라는 ‘쉬운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김소영 작가의 말이다.(<어떤 어른>, 사계절)


‘쉬운 말’이라는 표현에 뜨끔했다. 가성비를 근거로 한 빠른 결정이 대세인 요즘, 문제 상황마저 차별과 배제라는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을 꼬집힌 것이다. 어린이 혹은 어른이라는 것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정체성 그대로인데, 그것을 기준 삼아 너무도 쉽게 ‘노 키즈 존’이라는 문구가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아기가 타고 있어요’ 자동차 스티커처럼 디자인을 겸해, 매장의 주요 정보로 제공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이 말의 시작에 어떤 사건과 손해들이 있었음을 이해하고 감안하더라도 빠른 속도였다. 아마도 나처럼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도 지나쳐버린 시선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어떤 어른>에서 다시 이 말을 만나고, 나는 (아마 다른 어른들보다) 조금 더 부끄러웠던 것 같다. 바로 며칠 전, 중학생 딸과 ‘이름 붙이기’의 위험성에 대해 꽤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가 ‘페미’라는 말이 왜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쓰이는지 궁금해하면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름’에 대한 주제까지 이어졌던 날이었다.



아이야, 사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란다. 성별로 차별되는 남녀 모두의 부당함을 없애자는 성평등 개념이야.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랜 관습부터 시작해 억눌렸던 일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느라, 냉정함을 갖출 수가 없었던 것 같아. 물론 전투적인 자세로 대응해도 변화가 될까 말까 한 고집불통 유교 사회에서 냉정함이 웬 말이냐 하겠지만, 엄마 생각엔 그랬어. 어쩌면 첫 단추에서 잃어버린 냉정하고 단단한 기운이 너무 아쉽다고. 하지만 ‘페미’라는 말은 정치에서 선거 도구로 쓰면서부터 더욱 부정적 프레임을 입었다고 생각해. 전혀 다른 의미로, 새 이름을 얻어버린 거지.


‘이름’은 고유명사로 지칭하며 존재를 부여하잖아. 김춘수의 「꽃」처럼,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선명한 존재로 만져지는 것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이름’도 이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기도 한다는 걸 꼭 기억하렴.


너희가 쉽게 쓰는 ‘관종’이라는 말도 크게 다르지 않거든. 서로 다른 이유로 관심받길 좋아할 뿐인데, 그 이유와 상관없이 ‘관종’이라는 말로 폄하되어 버리잖아. 필요에 의해서 아이들끼리 쉽게 이름 지어서 무리를 나누기도 하는 것처럼. 아까 엄마가 이야기했던 정치에 이용된 단어들도 마찬가지야. 굳이 MZ 세대를 특정해 구분하고, 그것도 모자라 ‘20대 남성’과 ‘20대 여성’ 층을 구별해 서로의 접점을 없애기도 했다고 생각해.

무리를 구별해 서로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건 자칫 서로를 배척하거나 그 사이에 포함되지 못한 또 다른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정말 조심스러워야 할 일이라는 걸 말이야.




정말이지... 말만 청산유수였다.


정작 나는 ‘이름’의 중요성과 그 파급력을 이야기하면서도, ‘노 키즈 존’ 역시 그러한 이름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다시 부끄러웠다. 어쩌면 아이에게 더 가깝고 중요했을 이름은, 청소년과 더 가까운 어린이의 정체성이었을 텐데 말이다. 딸에게 <어떤 어른> 속 짧은 한 문단을 골라 읽어주고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일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이름’이 주는 강력한 힘을.

쉽게 이름 붙여 구별하고, 이름 밖으로 배제하는 우리를 돌아볼 기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김소영 작가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구절절한 말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 불편한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서로 어떤 점을 주의하고 배려해야 할지를 말하고 들어줄 시간을 조금 내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키오스크처럼 간단한 터치만으로 주문이 완료되는 관계가 아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배제와 편 가르기를 위한 이름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좀 더 서로의 사정을 헤아려 듣고 조율하는 불편함을 참아본다면 어떨까. 적어도 오늘의 어른들이 감수한 작은 불편이, 다음 어른이 될 우리 아이들에게 작은 연결점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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