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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멈추고, 플랭크와 씨름 중입니다

관절을 아껴가며 5초씩 나아가기 <오늘은 오늘의 플리에부터>

by 시루


2018년 겨울 ‘걷는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 읽는 분들의 걷기 모임에 슬쩍 관심을 내비쳤다가, 일사천리로 정식 멤버가 되어 8년째 걷고 있다. 걸음수와 운동량 확인이 가능한 미밴드, 갤럭시핏 등으로 정해진 목표를 채워 인증하는 모임이다.

처음에는 실내 러닝머신 위에서 걷기 시작했지만 곧 밖으로 향했다. 이사 온 후에도 여전히 낯설던 외곽과 산책로 곳곳을 매일 걸으며 익숙해졌고, 땀 흘린 뒤 천천히 돌아오며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좋았다. 코로나로 외출이 힘들던 시절에도 마스크와 모자로 무장해 아침 걷기 운동을 이어갔으니 걸으며 점점 체력이 나아지는 건 물론, 그 시간들이 내 일상에 큰 자리를 차지했던 듯하다.


익숙해지니 욕심이 생겼다. 이제 ‘뛰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언젠가부터 갑자기 늘어난 뛰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이만하면 나도 달릴만한 체력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설렘이 앞섰다. 러닝 인증 앱을 설치하고, 모임 분들의 조언대로 빠르게 걷다 잠깐 뛰는 인터벌 방식의 초보자 코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학교 체육 시간이 마지막이었던가, 출근길 지각이 걱정된 달리기가 마지막이었던가. 내 몸의 세포들이 기억을 망각했는지 첫날부터 숨이 찼다. 그래도 몇 년을 꾸준히 걸었는데 제아무리 비루한 체력이라 하더라도 이것밖에 안 되나 싶었지만,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는 짧은 구간만으로도 충분히 벅차올랐다.


걸으며 땀이 나는 것과 전혀 다른 성취감이었다. 발로 땅을 딛고 박차며 나아가는 동안 스치는 바람까지, 모든 것이 숨을 가진 듯 심장 박동에 맞춰 뛰는 감각이 생생했다. 설레며 아침 운동을 나섰고, 사람 많은 산책길을 피해 바깥쪽 조용한 길에서 나름의 고군분투 달리기를 이어갔다.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심장이 터질 듯한 한계점에 익숙해지면서 뛰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는 희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자고 달리기를 하셨대요!”

딱 한 달 인증 달력을 채웠을 때 왼쪽 무릎에 통증이 생겼다. 오래 치료받은 적 있는 무릎이라 다니던 병원 의사를 찾아갔더니 대뜸 목소리를 높인다. 마치 ‘아무나 달리기를 해도 되는 게 아니’라는 듯 잔소리를 늘어놓으니 진상 환자가 되어버린 듯하다.

“땅을 딛는 운동이 좋다고 추천하셨잖아요.” 의사 말을 끊어봤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맨땅에서 걷는 게 최선입니다.”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이제 막 기운이 붙어서 하루가 다르게 뛰는 호흡이 길어지려는데 또 이렇게 나를 멈춰 세운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십 대 초반 열정 넘치던 프로그래머로 밤을 새우던 때, 큰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지만 허리 디스크가 생기는 바람에 병가를 내고 빠져야 했던 게 시작이었을까. 결혼 후 아이를 가지고 싶었을 때도, 세월이 흘러 집에서 작은 공부방을 시작했을 때도, 내 몸이 빨간불을 켜고 선을 그었다.

어릴 적에도 자주 삐끗해서, 한밤중에 아빠의 오토바이를 타고 접골원 할아버지 댁을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한창 일 할 때는 직업병으로 인한 디스크인가 했더니, 나이가 들어 여기저기 검사를 해 보면서 알게 되었다. 손목도 각 뼈를 연결하는 마디가 유독 넓어서 건초염이 오기 쉽고, 뼈와 관절이 유난히 약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라고. 그러니 관리를 못한 탓이라 좌절하지 말고 ‘날 때부터 이렇게 생겼으니 아껴서 잘 살아야겠다’ 여기라는 것이다. 도대체, 위로가 될 수 없는 위로의 말이었다.

뛰기를 포기하고 다시 ‘걷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초콜릿 맛을 알아버렸는데 손에 쥔 초콜릿을 통째로 뺏긴 기분이 들어 분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지만, 걷기라도 해야 한다. 끌어올리기는 어렵지만, 사라지는 건 정말 한순간인 것이 체력이니까.

조금씩 걸으면서 치료를 받던 중, 물리치료사 한 분이 솔깃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 무릎이 안 좋은 상태라 더 통증이 있지만, 사실 걷고 뛸 때 필요한 것은 허벅지 근육과 골반을 감싼 근육이라고 했다. 무릎을 잡아줘야 할 주변의 근육이 제 운동 능력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무릎 관절 혼자 애쓰느라 마모가 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집에 돌아와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근력 회복 후 다시 느리게라도 달리게 된 사례들이 있었다. 치료 영상들을 찾아 허벅지와 고관절, 대퇴근 운동을 시작했다. 각 근육들을 따로 인식하며 자세 잡는 게 서툴렀지만 오래전 필라테스 수업 때 배워둔 움직임들이 도움이 되었는지 차차 익숙해졌다. 더 움직임이 큰 동작을 곁들이고 싶지만, 작년에 찢어졌던 허리 디스크가 어렵게 아문 지 오래지 않았기에 참아본다. 아직 등을 굽히거나 젖히는 운동은 제외해야 하니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대신 ‘플랭크’를 도전해 보기로 했다. 코어 힘을 함께 기르면서 전체적인 근력에도 훨씬 도움이 되니 많은 분들이 추천했다. 팔꿈치와 발끝만 바닥에 닿고, 일직선으로 몸을 곧게 편 자세로 버티는 운동이라 코어 힘만 제대로 준다면 지금의 내 몸 상태에 무리를 주지 않는 완벽한 운동인 것 같았다.


‘플랭크가 뭐라고. 그냥 버티면 되는 거지.’

5초 만에 깨달았다. 5초의 코어 근력도 없는 몸이었다. 직립보행이 자연스러운 인간이니 걷다가 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바닥과 수평을 이루고 버텨내는 것은 전혀 다른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내 좌절하고 포기했을 법한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5초씩 늘려보자’ 플랭크 운동 영상마다 1분이 최소 단위였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으니 어쩐지 환한 미래가 그려졌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분명히 버티는 시간이 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듯하다. 가장 중요한 자세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배우는 데 공을 들였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더 단단히 받치는 힘이 생겼다. 플랭크 몇 번 만에 찾아오던 근육통 대신 ‘할만한데?’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시간을 늘려가면서 마음도 함께 단단해졌다. 5초, 10초… 이 몇 초들은 그냥 버텨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었다. 계속할지 멈출지, 버티는 힘을 유지할지 포기할지를 고민하며 끊임없는 결단으로 채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1분을 거뜬히 넘어서게 되었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은 ‘여기까지’가 아니라 ‘조금만 더’라는 결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오늘의 플리에부터> 김윤이


“날마다 플리에부터 연습해요.”

『오늘은 오늘의 플리에부터』 김윤이 작가의 그림책 속 그림들이 떠올라 문득 울컥했다. 발레의 동작들이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진 그림책이지만 사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물들의 작은 발짓 손짓이다. 이제 막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부터 세계적인 발레리나까지 모두 날마다 기본 동작인 플리에로 하루를 시작한다.

각자의 삶이 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에 빠져 있지 않고 플리에로 손을 쭉 펴고 발끝을 쭉 내밀어 나를 펼친다. 그 몸짓이 끊임없는 작은 변화들을 이루었을 거라 생각하니 나의 하찮은 ‘5초’가 굉장한 가치로 느껴졌다. 숨 가쁘게 뛰거나 격한 운동으로 희열을 느껴야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몸이 선을 그으며 멈춰 서길 종용해도, 다른 방식으로 우회해서라도 조금씩 나아가는 사랑의 방식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배우는 게 많아지는 것만큼, 하지 말라고 차단당하는 일들도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더욱이 늘 건강함을 부러워해야 했던 나는 그런 순간들을 너무 자주 만난다. 쉽게 좌절했을 순간이었는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빼꼼 다른 길을 찾는 나를 보듬어주기로 했다.

오늘도 플랭크와 더 오래 걷기에 도전하는 나는,

“살짝, 드미 플리에

크게, 그랑 플리에.”


나만의 5초를 지나고, 다시 1분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나아가고 있다. 다시 멈추고 싶은 날이 오더라도 잠시 멈췄다 일어서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아직은 나 스스로 5초를 결정할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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