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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날, 초록 곁에 머무는 마음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일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by 시루


집 안에 초록을 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거실 창 앞을 좀 채워볼까 싶은 마음이었다. 남향 거실 가득 들어오는 오후 빛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서, 하나둘씩 작은 화분들을 골라 창틀에 올려두었다.


그러는 동안 아침 걷기 운동으로 몇 번의 계절을 반복해 만나면서, 초록에 뺏긴 마음은 더 깊어졌다. 매일 아침 산책로에서 만나는 나무들은 항상 나보다 계절을 먼저 알아채 나를 놀라게 했다. 작게 움트는 잎, 말없이 부풀고 미련 없이 초록을 벗는 존재들에 자주 마음이 붙잡혔다. 그 장면들을 더 가까이 데려오고 싶은 욕심이 생겨, 어느덧 크고 작은 화분들이 대가족을 이루었다. 거실 창 앞을 가득 메우고 서로 다른 초록을 뽐내던 겨울, 코로나 바이러스로 바깥세상이 멈췄다.


갑자기 시작된 세상과의 단절은 불편을 뛰어넘어 불안과 공포를 불러왔다. 날마다 전해지는 세상의 뉴스들이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와, 너도 예외는 아니라는 듯 예측 불가능한 내일을 강조했다. 방학이 끝나도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나 또한 잠시 쉬어가려던 공부방 문을 완전히 닫기로 했다. 건강 문제로 코로나 직전에 이미 휴직 중이던 남편까지, 네 식구가 함께 ‘안쪽’ 세상에 갇혔다.


불안은 때로 감정이 아니라 내 몸의 감각에 가깝다. 아무 일도 없지만 ‘뭔가 다가올 것만 같은’ 마음으로 심장을 조이는 느낌. 첫째 아이로부터 시작된 코로나 확진이 둘째를 거쳐 나 역시 양성이 되기까지, 혼자 방에 격리된 아이를 돌보며 내내 불안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지만, 호흡기 질환인 코로나는 내게 판도라의 상자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엑스레이 다시 한번 찍어봐요!”

병원 정문 앞 주차장까지 나섰던 우리를 부르며 누군가 달려왔다. 허겁지겁 펄럭이는 하얀 가운 기억만 남았으니, 의사였을까. 아빠와 함께 다시 병원으로 들어간 나는 검사실을 거쳐, 바로 수술실로 이동하는 바퀴 침대에 눕혀졌다. 주변의 긴박함과 여러 외침의 파편들, 갑자기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 큰 문을 향해 아빠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고의 설렘이 채 가시지도 않은 봄이었다.


“기흉입니다. 2시간도 안 남았었어요.”

폐포가 이미 다 터지고 한쪽 폐가 쪼그라들어 완전히 붙어버리면 숨이 그친다고 했다. 처음 엑스레이 검사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의심의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그 병원에 입원 중이셨던 할머니의 퇴원일이 아니었다면, 아빠가 조금만 일찍 자동차 문을 열고 출발해 버렸다면…….

수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연 하나가 나를 살렸다. 하지만 천방지축 왈가닥이던 나는 내 몸에 불안 하나를 달고 살게 되었다. 더 이상 게임 벌칙으로 ‘인디언 밥’을 외치며 등을 우다다다 두드려서도 안 되고, 호흡 압박이 심한 등산을 해서도 안되고, 어쩌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분만이 힘들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말이 꼬리표로 달렸다. 무엇보다, 관 삽입 수술로 공기를 빼내고 폐를 다시 펼 수는 있었지만 재발하는 순간 ‘끝’이라고 단정하는 의사의 눈을 잊을 수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뉴스마다 온통 삼엄한 복장으로 무장한 의료진의 경고를 들을 때마다, 내게 ‘끝’을 경고하던 의사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두 딸과 남편, 이제 막 건강에도 자신이 붙고 평온한 날들에 돌이 던져진 것이다.

이렇게까지 아플 수가 있나 싶도록 기침을 하며 누워있던 방에서 홀로 불안에 떨어야 했다. 남편이 살뜰하게 챙겨서 문 앞에 가져다주는 식사도 모래알처럼 입에서 겉돌아 점점 더 힘이 들었다. 밤중에 심해지는 기침으로 가슴 통증이 오니, 혹시나 폐에 무리가 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온몸의 감각을 깨워 불확실한 결말로 나를 몰아넣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 그저 심한 감기처럼 겪고 지나갈 일이 당연하다는 듯 말해보아도 마음은 이미 심연에 닿아있었다.


격리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조금 나아진 정신으로 거실로 나왔을 때, 반기는 아이들 뒤로 펼쳐진 풍경에 깜짝 놀랐다. 꽃망울이 가득 올라와 반가웠던 데이지는 꽃은 물론 작은 잎들마저 까맣게 타들어버렸다. 겨울 막바지에 꽃대를 올리던 제라늄도 기세가 꺾인 채 꽃망울이 말라버렸다. 물주기가 짧은 꽃 화분들은 불과 며칠 사이에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 된 것이다.

마른 줄기를 자르고, 다시 물을 주고 제자리를 찾아 볕을 쬐도록 돌려놓았다. 며칠 동안 창가를 오가며 화분 받침대와 테이블을 정리하고, 생기가 돌아오는지 살피면서 나 또한 함께 볕을 받으니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그러면서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 초록이들은 그저 창 앞을 장식하려고 물만 주며 가꾸던 대상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며, 아침마다 화분 앞을 서성이던 걸음. 오전 해를 잘 받는 자리에 여린 잎 쪽을 돌려놓고, 깊숙한 오후 해가 들 무렵엔 다시 자리를 옮겨주며 내 마음도 함께 온기를 받았다. 분갈이를 해 준다며 흙을 털고 화산석을 골라 넣는 동안 내 불안도 털고 새 기분들을 골라 넣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화분들이 꼭 아기 같아?”

창가 앞을 서성이는 내게 질투 어린 질문을 던지는 딸에게 그저 웃어주었었는데, 식물들을 ‘돌본다’고 가볍게 생각했었나 보다. 사실 이 초록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며 함께 지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여유를 찾은 것 같습니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속 화분처럼, 나의 초록이들도 조용히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우리 주변에 늘 있지만, 방치되거나 때론 버려지는 식물들이 사람들을 지켜본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우리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초록이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지점에 내가 겹쳐진 걸까.


나만 돌보고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 첫걸음부터 하나씩 나를 일깨워주던 첫째 아이처럼 식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의 시작에 힘을 보태고, 미래를 향한 불안한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주던 존재들. 그림책 속 다양한 표정의 식물들처럼, 돌보는 내 손길이 수월하도록 줄기를 꼿꼿이 세우려 애쓰는 모습이 그려졌다. 넓은 잎을 닦아내는 손을 향해 좀 더 빳빳하게 잎을 들어올렸던 건 아닐까. 무성한 줄기를 다듬는 가위질에도, 틈 사이로 바람이 드는 이치를 보여주며 내심 뿌듯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하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났다.

‘식물들이 사실 나를 돌보고 있었구나.’ 오히려 ‘돌봄의 시간’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는 생각에 더 애틋해졌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무언가로 자꾸 나를 채우려 애쓰는 것보다 잠시 멈추는 하루도 필요하다. 잎을 솎아내고 가지치기 한 식물이 노곤한 햇살을 고루 받아내는 것처럼, 나 역시 빼곡한 마음보다 듬성듬성 바람들 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가만한 마음으로 나를 들여다보아야, 작은 걸음이지만 꾸준히 나아가는 과정인 오늘을 응원할 여유를 붙들 수 있다.

끝이 없을 것만 같고 답답하기만 했던 시간 동안 나만의 구석이 되어준 창가 자리를 돌아본다. 조급하고 불안한 날에는 여기 앉아 식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서로의 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매일 물을 준다고 해서 매일 표가 나게 자라지 않고, 꽃대를 올린다고 모두 꽃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아무 변화도 없지만,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일. 그대로 두는 일 또한 돌보는 일이라고, 마음에 빈자리 하나 남겨둔다. 이제는 계절 따라 자연히 흘러가는 과정에 좀 더 마음을 두어야겠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심은 무언가도 자라고 있다는 걸 믿게 되었으니까.




*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권정민 그림책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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