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두 세계가 만나는 시간 <똑, 딱>
“엄마도 엄마라서 속상했어?”
아이가 달려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무슨 일인가 뒤돌아 둘러보니, TV가 켜져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잃었다고, 육아의 시기가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는지 토로하는 한 여성의 젖은 얼굴이 보였다.
이제 그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다는 인터뷰를 듣다가, ‘혹시나 우리 엄마도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잔뜩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이 진지한 눈빛을 더 마주했다가는, 나도 과거로 불려갈 듯해서 얼른 대꾸했다.
“아니, 엄마는 잃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식탁을 정리하며 최대한 가볍게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물론 서툴고 부대끼고, 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힘들었지. 그래도 늘 나를 위한 여지를 남기며 아이를 키웠다는 걸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처음부터 베테랑 엄마이자 ‘나’였던 것은 아니다. 변화가 없었다면 나 역시 저 인터뷰이들 중 한 명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만난 곳은 동네 카페였다. 신생아와 세 살배기 딸을 데리고 긴 겨울을 보내니 이제 짧은 산책 정도는 가능한 봄이 되었고 아이들도 여물었다. 당장에 유모차를 밀고 나왔지만, 아직 공원까지 다녀오기는 둘째에게 먼 거리가 될 듯해 쉬어가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향긋한 소란함. 발로는 잠들락 말락 가물거리는 둘째 유모차를 앞뒤로 살짝씩 밀었다 당기면서 두 손은 첫째의 아이스크림 컵을 챙겨주느라, 얼핏 부산스러워 보였을 우리 테이블. 하지만 나는 고요하게 충만함을 만끽 중이었다. 커피 향과 음악만으로 이미 행복했다.
그러다 아이들 자리 뒤쪽 단체석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다섯 명이 맞댄 머리가 웃으며 흔들릴 때마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책들이 보였다. 책을 함께 펼치고, 각자의 종이를 넘기거나 무언가를 기록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또래인 듯 보이는 분들도 있는데… 이 동네 책 모임인가?’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기울였지만, 그들을 그토록 진지하고 즐겁게 만드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분별할 수 없이 전해지는 뒤섞인 웅성거림 때문인지 점점 답답해졌다.
‘부럽다!’ 질투 섞인 부러움이 폭죽처럼 터지는 걸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점점 거슬리기 시작한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외면하며,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묻은 휴지를 슬쩍 내려놓았다. ‘어떻게 저런 여유가 있는 거지?’ ‘아이들은 다 큰 걸까?’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테이블 안으로 거둬들이며 깊은 한숨이 나오고야 만다. 자꾸만 녹아 아이 손에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탓하며, 툴툴거리는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함께 책을 읽고 ‘어른의 말’을 나누는 그들이, 눌러왔던 내 마음을 터뜨려버렸다. 내 인생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세상과 단절된듯한 기분까지 숨길 수는 없었던 시기. 나도 여전히 ‘나’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 어른들과 밀도 있는 생각을 나누는 관계도 부러웠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성취를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알 수 없는 박탈감이 함께 밀려왔다.
며칠을 헤매다, 온라인 카페를 생각해 냈다. 아이들과 온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관계의 ‘접속’이 가능한 곳. 다행히 검색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모임들을 찾을 수 있었고, 고민 끝에 그림책 카페와 영어 원서 카페에 가입했다. 바쁜 회사 생활에서 육아로 건너오는 동안 까무룩 잊고 말았던, 읽고 배우는 즐거움을 향한 욕구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카페에서 함께 모였던 분들처럼 아직 훌훌 나를 내세워 밖으로 나설 여유는 없지만, 온라인이 최선이라면 여기서 찾으면 된다. 그렇게 ‘내 자리’ ‘내 목소리’를 만들어 나갔다.
『똑, 딱』 에스텔비용-스파뇰 작가의 그림책 속 두 친구가 내 안에 있었다. 늘 함께였던 둘도 없는 친구가 사라져, 내가 아닌 다른 세계의 즐거움에 빠져든 모습을 발견했을 때 ‘똑’이가 느꼈던 질투와 분노는 사라짐이 예견된 마음이었다. ‘딱’이 역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내고는, 친구를 향해 달려가게 될 테니까.
“똑이야! 똑이야!
나 독수리만큼 높이 날았어!
딱이야! 딱이야!
나 땅에서 솟아오른 꽃을 봤어!”
그림책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도 점점 다른 세계가 열렸다. 아이들과 함께 읽던 그림책을 어른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읽고 나누며 생각이 확장되는 즐거움이 고전 읽기, 긴 호흡의 시리즈 문학들까지 모여 읽게 되었다. 실제로 아이들을 재우고 밤에 모여 독서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글쓰기 모임도 만들어져 쓰기의 세상으로 나오는 출구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과 떨어진 짧은 시간이나 걷기 운동 중에는 EBS 영어회화 스터디 모임에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원서 읽기로도 연결되어 두 카페를 오가며 나를 채웠다.
낮 동안 아이들과 부둥켜안으며 지낸 시간의 나와, 어둠 속에서 홀로 깨어 나를 채우던 시간의 나. 마음속에 ‘똑’이와 ‘딱’이 모두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밤 내 안의 두 친구가 서로에게 달려와 마주 앉았다. 각자 그날의 발견들을 조잘조잘 펼쳐내느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그 시절을 보냈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엄마’로 고립되지 않고 나의 성장과 취향을 지키고 싶어서 두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아이들 역시 함께 북클럽을 만들고 오랫동안 참여하며 자랐으니,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그 시간에 감사할 뿐이다. 카페를 박차고 나오게 했던 질투에서 시작된 작은 출발이, 나를 더 단단하게 키워낸 것이다.
그러니, ‘엄마도 엄마를 잃었다고 생각해?’ 걱정하며 묻는 작은 눈빛에 진심으로 답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그 반대였다고. 오히려 너희들 덕분에 새로운 문을 열었고, 좋아하는 것을 찾았고, 꿈꾸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제야 얼굴이 환해진 아이가 선물 같은 말을 툭 던지며 웃는다.
“다행이다! 난 엄마가 내 엄마라서 너무 좋거든!”
아이고 이 사랑둥이 녀석아, ‘엄마도 너희들이 내 딸이라 감사하거든!’ 외치며 아직 보들보들 작은 몸을 감싸 안고 웃어본다.
성장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언제 이렇게 자라서 나를 엄마 너머의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어진다. 이 아이들도 ‘똑’이와 ‘딱’이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품고 내게 달려와 환하게 내보일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기에, 내 자리를 조금 더 단단히 가꾸고 싶다.
가끔 나도 알아채지 못한 불안과 조급함을 먼저 느끼고 등을 도닥여주는 작은 손 앞에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기를. 그곳에 이르기 위해 꾸준히 읽고 쓰면서, 오늘도 더욱 ‘나’로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