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맞추어 옷을 입듯이,

딸에게 보내는 그림책 편지 <가만히 들어주었어>

by 시루

첫째가 학원에서 늦었던 날, 퇴근하던 남편이 픽업을 맡아주었다. 아이가 먹고 싶다는 와플을 구워놓고 기다릴 수 있겠다며 부지런히 반죽을 휘젓는데 카톡이 왔다.

- "엄마, 나 백지 시험 망친 것 같아."

- "갑자기 생각이 안 났어"

- "어떡하지"


휴대폰을 확인하기도 전에 연달아 울리는 알람.

카톡 글자 너머로 아이 호흡이 느껴졌다.


내게 카톡을 쏟아붓고 있는 눈빛이 너무나 그려져서 마음에 휑하니 바람이 지나갔다.

손잡아 주는 마음으로 빠르게 답을 보내주었다.

-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뭐"

- "어여 와서 와플 먹자아~"


역시 기다렸다는 듯 답이 날아온다.

- "히힛"

- "좋아요!"


다행이다.

엄마의 '괜찮다'라는 말로 위로가 될 때라서.

괜찮다는 말이 섣부른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아직 모를 때라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건, 말 그 자체가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의 '때'에, 그 사람의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 <가만히 들어주었어> 옮긴이의 말

첫째와 카톡을 주고받은 다음 날, <가만히 들어주었어> 그림책을 다시 펼쳤다.


<가만히 들어주었어> 코리 도어펠드


새롭고 특별한 것, 뭔가 놀~라운 것.

그림책 속 아이가 눈을 빛내며 쌓아 올린 블록이 난데없이 날아든 새들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빠르게 알아챈 닭이 달려와 호들갑을 떨고, 곰이 다가와 화가 날 땐 소리를 질러보라고 조언한다. 코끼리, 하이에나, 타조, 위로해 주러 다가온 녀석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려 애쓰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느냐.


전-혀.

아이는 화를 내기도, 그냥 웃어 버리기도, 문제점을 분석하기도 싫었으니까.


그때 다가온 토끼.

<가만히 들어주었어> 코리 도어펠드



아이에게 등을 맞대 가만히.

온기를 나눠주며 조용히 기다려준다.


이윽고 테일러가 말했어.
"나랑 같이 있어줄래?"
토끼는 테일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어.




딸아,

마음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기에 억지로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는 없단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특히 부모 입장에서는 가만히 기다려주기가 쉽지 않아. 답을 찾아주고 싶고, 별것 아니라며 털어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고야 말지.


네게 친구 같은 아빠가 곁에 있었지만, 그 순간 받고 싶은 위로는 장난 섞인 말 대신 '괜찮아' 다독이는 목소리였겠지. 그러니 깜깜한 차 앞자리에서 휴대폰에 코를 박고 내 답장을 기다렸을 거라 생각했어. 평소엔 답을 넌지시 짚어주는 위로에 더 반응하는 너이지만, 그 순간 화면 너머의 네 눈빛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감사했단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잘 넘겼지.

그래 엄마 여기 있어, 내 손이 필요한 순간.


여름이 왔다며 옷과 샌들을 바꿔주느라 분주했듯 위로도 그런 게 아닐까, 잠든 너를 바라보며 한번 더 떠올려 봤어. 계절에 맞게 옷을 맞추듯, 너희가 성장하는 계절에 맞게 위로의 방식도 달라지는구나 싶어서 새삼 자는 네 키가 더 커 보이는 밤이야.


이렇게 내 알아챔을 응원해 주는 그림책이 있으니 몹시 다행이기도 하고. 이 그림책을 옮긴 신혜은 님의 말처럼, 그 사람의 때와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 어쩌면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매 순간의 온도와 마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내게 들려오는 이야기들. 그림책의 언어를 함께 들을 수 있어 감사한 날이다.


조금씩 변해갈 위로의 길을 알아챌 여유가 내게 있기를.

우리가 나눈 그림책 이야기들이, 주고받을 위로의 조미료가 되길 바라며.


# 2022.07.05




<가만히 들어주었어> 코리 도어펠드 / 북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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