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는 걸음

사색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아무개가 되어 바라보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by 시루

아침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몇 달 쉬었더니 자꾸만 꿈지럭대는 마음을 이기기 쉽지 않다. 탁 소리를 내듯 핑계들을 접어두고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고르고 있으려니, 익숙한 감각이 다리를 예열시키는 기분에 마음의 소란이 가라앉는다. 자, 가자!

큰길을 건너 숲에 들어서자마자 운동 나온 사람들 그림자가 분주하다. 역시 나오길 잘했군. 그간의 안부가 궁금해 오솔길 방향으로 먼저 접어들었다. 여름 문턱의 나무들은 그새 더 무성해진 초록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몇 년을 오가며 걷고 뛰던 길은 맨발 걷기를 위해 최근에 다시 공들여 정비한 듯 말끔한 바닥이었다. 무성한 풀숲을 살피던 즐거움이 사라져 어딘지 밋밋한 걸음을 재촉하다 결국 오솔길을 벗어나기로 한다.

산책로에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왼쪽에서 누군가 휙 뛰어든다. 와, 하마터면 인사할 뻔했다. 작년 내내 아침마다 마주치던 날렵한 실루엣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몸이 먼저 나간다. 초겨울까지도 얇은 러닝 복장으로 이 길을 뛰어 오가던 쉬지 않는 열정으로, 그저 ‘걷던’ 나를 ‘뛰는’ 욕구에 꿈틀 하도록 자극했던 분이었다. 못 본 사이 길어진 머리를 어깨 아래로 찰랑거리며 앞서가는 모습이 반가워서 마음이 활짝 펴졌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뜨거워진 태양에 목 뒤가 뜨거워졌다. 되돌아가는 길에서 나보다 몇 배로 땀 흘리며 뛰는 그녀를 다시 마주했다. 뜨거운 호흡과 스치는 순간 가볍게 눈을 마주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만끽하는 아무개의 시간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아무개가 되는구나.

인간들이 무어라 부르든 숲길에서 크고 작게 피고 지는 이름 모를 꽃처럼, 걷는 우리도 지금은 무명 씨와 아무개였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고 무명 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걷는사람, 뛰는 사람,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으로 불리는 시간. 엄마, 아내, 자식의 이름에 든 무게를 훌훌 내려놓고(어쩌면 이성적인 의식 또한 버리고) 홀로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개가 되기 위해 아침마다 부지런히 걸으러 길을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아니고, 그냥 나로 걷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애씀이었던 걸까.


머릿속에 청량한 풍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혹시, 몇 년 전 어두운 우울에서 나를 끌어올린 것은 쓰기가 아니라 걷기였을까. 자고 일어나니 ‘내일’이 베개 뒤로 사라져 버린 듯 아무 기대도 없이 무기력과 무감각이 잠식하던 때를 떠올렸다. 왜 시작되었는지 불분명한 것처럼 어떻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는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기에, 글쓰기가 나를 다시 감각하게 했다고 가끔 이야기하는 시절.

아무개가 되어 걷는 나를 자각하는 순간,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눌러쓰던 아침의 내가 보였다. 아마도 걷기 모임 분들의 응원과 공감의 말들이 내 등을 두드리며 신발을 신겨주었을 것이다. 현실을 되찾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내 몸에 직접 닿는 감각이었나. 숲길을 혼자 걸으며 나는 내 눈이 아니라 아무개의 눈으로 나를 벗어나는 시간을 만끽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아무개의 시선이 쌓여 나를 바꿔놓았다. 움트는 모든 것에 작은 환희를 느끼며 온갖 초록을 들여다보며 걷던 봄을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느끼기 시작했다.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보다 꽃이 지고 난 꽃자리에 더 오래 머물렀다. 고고하게 꽃잎을 펼친 모과꽃의 빛깔에 감탄했던 어느 봄. 새색시가 입던 한복 같던 꽃잎을 다 떨구고 남은 꽃자리의 단단함에 매료된 적이 있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생을 드러낸 존재의 발견은, 흐렸던 내 시야가 탁 트이게 안내등을 켰다. 정해진 형체가 없으므로 더 견고하고 풍부한 의미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깨달음이 나를 후려쳤다. 없는 상태가 만들어낸 새로운 ‘존재’의 질감이 내 감각을 깨웠다. 내 불안과 어둠도, 지금의 존재 없음까지도 오히려 더 많은 이해와 주장에 닿을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던 듯하다.


이제 나는 안다. 꽃이 움트기까지 인내의 시간도, 화려한 만개의 시간도, 떨어지고 난 부재의 감각까지 모두가 자연스러운 순환이다. 어떤 관계든 시작의 반짝임보다 부재로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오히려 길고 깊다. 걷는 계절에서 이 시간들을 통과하며 단련된 마음은 이제 처음보다 끝에 더 오래 머물러도 평온하게 되었다.

없어진 슬픔이 아니라 흔적에서 새 의미를 찾고 긍정하려는 변화는, 내 껍질을 벗어던진 낯선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부유하던 생각들을 삶으로 끌어당겨, 땅을 딛고 단단하게 설 수 있도록 한 아무개의 이 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이 감각들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내 꿈인 ‘사색하는 할머니’에 가까워질 수 있겠다. 잃었던 내일의 기대감을 등에 업고, 여전히 길 위에선 타인의 시선을 장착할 수 있는 나이듦을 기대해 본다. 물론 자꾸만 주저하게 만드는 낯선 일의 연속이겠지만, 외면하지 않고 걷다 보면 그 또한 나를 살리는 감각이 되지 않을까. 꽃자리가 더 단단할 먼 미래를 위해,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갈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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