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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형 엄마의 그림책, 시작은 꼼수

프롤로그

by 시루

‘책 육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강제적이고 맹목적인 책 육아는 더더욱. 그 말 속에는 엄마의 취향과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설거지하다가도 고무장갑을 벗고 달려가라니, 처음 들었을 때는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아이가 책 읽기를 원한다면,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읽어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연시되는 엄마의 희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의 성향마저 배제된 강요로 느껴져 묘한 불편함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읽어주었을까? 그건 내게 최적이고, 가장 효율적이며, 오히려 나를 충전시켜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책 육아’라 불리는 방식이 아닌, 놀이의 즐거움과 취향이 스며든 시간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내 에너지가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먼저 채워져야 했다. 하지만 초보 엄마였던 나는 늘 피곤했고 자꾸만 몽롱함에 잠긴 채 하루를 버티기 바빴다. 놀이 매트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귀신같이 알아채 울던 아이. 식사 준비를 할 때면, 잠깐의 틈을 벌어보려 거실에서 주방으로 향하는 바닥에 두꺼운 미니 보드북을 듬성듬성 ‘뿌려’두곤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색색의 책들로 붙들어두고, 책을 펼치는 시늉을 하는 동안 잠시 시간을 벌어보려는 미끼였다. 다행히 아이는 손에 쥐거나 물고 빠는 책과 놀며 자랐고, 조금씩 커가면서 그림책에 관심을 보였다. 그때부터 나도 그림책의 세계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이를 품에 안고 그림책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이 좋았다. 먹이고 재우는 복닥거림을 잠시 뒤로하고 함께 앉으면, 책 읽는 내 목소리를 따라 아이의 재잘거림이 흘렀다. 버티기에 급급했던 에너지가 절로 채워지는 게 느껴져 더욱 그 시간에 머물고 싶어졌다.

내향적인 나의 성향이 아이에게 단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외향적인 아빠가 적극적으로 몸 놀이를 맡아주었기에, 거침없이 뛰놀고 온 아이와 가만한 시간을 보내는 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아이와의 정서적 끈이 단단해질수록 내 불안도 조금씩 사라졌다. 아이 손을 잡고 물 한가운데로 풍덩 뛰어들지는 못하더라도, 물가에 서서 아이의 취향과 리듬을 지켜봐 주고, 날 필요로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을 자신도 생겼다. 나의 방식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림책은 엄마가 된 나를 토닥여준 첫 친구였다. “괜찮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림책을 통해 스스로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기에 나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안에서부터 채워져야 행복한 사람이다. 내 조급함과 결핍을 다독이니 자연히 여유가 생겼고, 그 덕분에 내게 온 행복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와르르 쏟아낼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선순환이 있을까.

물론, 우리의 다른 모습을 가끔 상상하기도 했다. 발 벗고 뛰놀며 세상을 체험하는 일이 내게 더 편했다면, 아이와 교감하고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이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가 될 거야.”


언젠가 둘째가 했던 말이다. 우리의 시간을 그대로 닮은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나는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꽤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그야말로 우리 집의 에너자이저 둘째는 산으로 들로 훨훨, 넓게 활개치며 땀 흘리는 즐거움이 큰 아이다. 이야기책을 좋아하지만, 직접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히는 배움과 더 잘 어울렸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네가 엄마가 된다면, 너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줘.”


활자가 아닌 몸짓으로 아이와 더 진하게 소통한다면, 책은 그저 종이에 불과한 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결국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고심하며 맞춰가도 사랑의 모양은 매번 달라지고, 정답이 없으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품으면 된다. 결국 남는 건, 서로에게 닿던 온기일 테니까.

매 순간 한 손을 아이에게 내어주며 걷는 길,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는 멀리 갈 수 없다. 내게 자연스럽지 않고 버거운 일이라면, 꼭 필요해 보여도 과감히 내려놓아 보는 것도 괜찮다. 엄마의 여유가 곧 아이에게 흐르는 너그러움이 되곤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좋아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된다. 책 말고도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선택한 그림책은 비록 처음엔 꼼수였으나, 어느새 내 마음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그림책 속 장면에 아이보다 나를 빗대어 읽는 날이 늘었고, 아이가 자라 그림책 북클럽으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기 시작하니, 매일 쓰던 편지에 답장을 받는 듯해 더 설렜다. 우리의 이 시간이 잊히지 않도록 남기고 싶어졌다. 엄마로서 꼭 알려주고 싶은 삶의 태도들, 건네고 싶은 마음이 넘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편지를 쓰는 일, 어쩌면 그게 육아가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그림책이었던 시간을 글로 모아두려는 이 시도는, 나의 또 다른 선택이다. 이번엔 꼼수가 아닌, 처음부터 진심인 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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