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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반죽하는 밤

부스러진 마음을 모아 굽는다

by 시루

부엌의 계절이 바뀌고 있다. 얼음이 땡그랑거리던 자리에, 막 끓어오른 보리차가 고소한 열기를 피워올린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뜻한 보리차부터 찾는 둘째가 달려와 코를 킁킁거리며 헤실댄다.

잠시 주춤하던 추위가 돌아와 마른 낙엽을 몰고 다니는 밤. 초겨울 서늘함을 느끼며 식탁에 앉았다. 오늘 할 일을 떠올리고 노트북을 펼치자, 첫째도 합류한다. 내일은 11월 11일, ‘빼빼로데이’. 작년에는 아이들과 직접 빼빼로를 만들었다. 초콜릿을 녹여 막대 과자에 입히고, 굳기 전에 알록달록 가루를 뿌려 장식하느라 분주했지.

그때만 해도 챙겨줄 게 많았는데, 올해는 혼자 초콜릿 쿠키를 굽겠다고 한다. 쿠키믹스 두 상자를 꺼내 들고 레시피를 살피는 아이가 사뭇 진지해서 귀엽다. 옆에는 선물용 포장 봉투 서른 개가 펼쳐져 있다. 중학교 친구들과의 마지막 이벤트라며, 친한 친구를 ‘고르고 골라 서른 명’이라는 말에 크게 웃는다. 마음이 참 넓기도 하다. 우리 집 작은 오븐으로 그 쿠키를 다 굽고 나면 이 밤이 저물겠구나, 하며.


사실 나야말로 바쁜 밤을 보낼 참이었다. 내일 아침, 동화 합평 모임이 있다. 더운 여름에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대략의 흐름을 써 두었는데, 며칠 전 습작 원고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과거의 나는 무엇을 쓴 걸까. 주인공이 아직 첫 페이지에서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였다.

한동안 에세이에 마음을 더 기울이다 보니 동화는 조금씩 뒤로 밀렸다. 결국에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합평 직전에야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원고를 펼치곤 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오늘은 기어코 우리의 주인공에게 첫 사건의 배경을 만들어 주겠다며, 비장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내가 만들어낸 인물인데도, 낯설고 외로워지는 열 살 작은 마음 곁으로 자꾸 다가가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친구들 속에서 왁자지껄 걸을 수 있을까. 어떤 부딪힘으로 과정을 그려내야 하나. 마치 어딘가 실재하는 아이를 향해 고민하듯 마음을 쏟게 된다. 생각을 쥐어짜도 좀처럼 길이 보이지 않으니, 그동안 읽은 동화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나 허무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흩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키보드 위 손가락만 하릴없이 움직여볼 뿐이다.


노트북 너머로 오븐 예열등이 켜졌다. 큰 그릇에 버터를 으깨고, 믹스 가루와 계란을 뒤섞느라 툭툭 타닥타닥, 끊임없던 주걱 소리가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오븐팬에 유산지를 깔고 반죽 덩어리를 하나둘 올리며 크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초콜릿 청크가 녹지 않고 콕콕 박혀 있는 모습이 벌써 맛있어 보였다.

팬이 금세 꽉 차버려서 아이는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쿠키가 구워지는 동안, 크기가 처음보다 커질 거라고 슬쩍 알려주었다. 그대로라면 서른 개를 만들 수 없을 거란 사실도.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반죽을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꾸덕한 질감의 반죽 덩어리를 조금 더 작게 뚝뚝 끊어,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동그랗게 모양을 잡는다. 성공이다. 한결 여유 있게 정렬된 반죽을 오븐에 넣으며 뿌듯한 환호를 날리더니, 곧 다음 반죽을 준비하는 녀석.


오븐은 달콤한 초콜릿 향을 내뿜고, 열기와 기쁨이 내 자리까지 번져온다. 아이 손끝에서 뭉쳐지고 달라붙다가 떨어진 반죽의 감촉이 내게 전해지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 고심하며 쓰고 있는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후드득 부서졌다고 바로 끝나지 않는다. 숨겨진 찬스(!)들이 있다. 거칠어진 귀퉁이를 다듬고 부스러기를 모은다. 손끝의 온기를 입히다 보면, 새로운 모양으로 천천히 되살아난다. (가끔은 이렇게 그러모은 가루들이 더 맛있다는 걸 아는 사람, 손!)

아직은 주인공이 어떤 미래를 입을지 전부를 계획하지 않아도 괜찮다. 캐릭터의 본질은 이미 꾸덕하게 그 안에 박혀 있을 테니, 나는 애정을 불어넣어 굽고 퍼지는 과정에 함께하기만 하면 되겠지. 엉성한 마무리라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주인공 스스로 이야기를 이끄는 순간이 올 거란 기대가 생겼다.


아이는 네 번에 걸쳐 서른 개의 쿠키를 완성했다. 스물아홉 개가 될 뻔했으나, 다시 떼어내기를 반복하더니 마지막 미니 쿠키를 만들어 개수를 채웠다.

오늘은 꼭 주인공을 등교시켜서 이야기의 배경만이라도 잡으려던 동화는, 아이와 친구들이 마주한 장면까지 나아갔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쿠키 굽기의 미학을 알려준 첫째 덕분인지, 훈훈하게 덥혀준 오븐의 열기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열기가 식어 바삭해진 쿠키를 맛보지 못해 아쉽지만, 마음으로 사랑을 요리조리 반죽해 보았던 밤. 달콤했던 자투리의 마음을, 글로 마저 구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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