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안부를 전할 수 있다면
“엄마는 왜 할머니한테 아프다고 말 안 해?”
거실을 서성이며 계속되던 전화를 끊자,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묻는다. 통화 내내 눌러두었던 마음이 덩어리째 꿀렁거렸다. 동그랗게 올려다보는 둘째의 눈이 금세 흐려진다. 나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단어들을 찾았지만, 마른 대답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엄마 안부를 묻지 않아서?”
그렇게 기침했는데 이상하다며 웅얼거리는 아이는 이미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독한 감기에 시달리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눈빛. 하필 타고난 공감러에게는 맞지 않는 대답을 해버렸구나, 아차 싶었으나 늦었다.
“나는 매일 엄마 안부를 물어줄게.”
발끝을 세워 나를 껴안는 아이의 손이 보드랍다. 아직도 오동통한 이 손으로 연필을 쥐면 동그란 모닝빵처럼 사랑스러운 둘째. 옆에 앉아 귀엽다고 유난을 떨면, 평소엔 통통한 손이 싫다던 아이도 주먹을 내밀며 키득거리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불쑥, 그 작은 손이 내 마음에 닿는다. 내가 가려둔 마음을 발견하고는 따뜻한 파도처럼 시린 등을 덮어주는 날이 있다.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긴 통화에도 나를 향한 질문은 없었다는 사실이 아팠다. ‘밥은 먹었니?’ 한마디를 듣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모르는 척 숨겨둔 서러움을 들킨 기분이었지만, 감정에 예민한 아이에게 할머니를 향한 작은 원망이라도 생길까 봐 얼른 수습을 시작했다.
“할머니가 지금 많이 힘드시잖아.”(정말 그렇다.)
“큰 수술에 항암 중이시고, 얼마 전엔 다리 수술까지 하셨으니까.”(그래, 정말 그렇다.)
아이가 아닌, 나를 위한 설명이었다. 당신의 고통과 우울, 흐릿한 미래와 박복한 과거를 한꺼번에 끌어안느라 두 눈과 귀를 가려버린 듯한 엄마. 나이듦이 가져오는 자연스러운 노화와 그저 그런 건강 문제에도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데, 엄마는 너무 큰 굴곡들만 연이어 만났다. 어쩌면 이만하기도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는 돌봄을 되돌려드릴 차례라고, 어떻게든 이 시기를 잘 지나가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던 거다. 한쪽 마음을 누르면 다른 마음들까지 함께 납작해진다는 걸 잊은 채로.
서운한 마음을 깊숙이 밀어 넣을수록, 다정함도 조금씩 섞여 숨어버렸다. 힘든 일이 몇 년째 반복되자 엄마는 더 짙은 비관과 연민으로 주위를 가로막았고, 소소한 안부조차도 묻기 어려워지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라 안타까워 마음이 저렸지만,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긍정의 면을 바라봐 주시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 몸보다 마음이 더 괴로워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의 항목들을 수집하듯 점점 객관적인 시선으로 엄마를 바라보게 된 듯하다. 하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건강을 잃는 순간, 견고하게 쌓아왔던 삶의 가치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수없이 지켜보았으니.
어느새 나 역시 엄마에게 일상의 안부를 묻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걸려 오지만,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나 물건 구매를 위한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건강에 대한 안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매일의 하소연에 섞여 있기에 더 물어볼 질문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의 보드라운 손에 위로받는 순간, 어쩌면 엄마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온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서로 지쳐서 위로보다 단호함이 앞서는 말 대신, 마음을 데워줄 누군가의 다정함이 있다면 좋았겠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매일 오전, 안부를 묻기 위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한 시간쯤 글을 쓰다 일어나 바깥 로비를 천천히 오가며 짧은 통화를 한다. SNS에서 유행하는 ‘퇴근할 때 안아주기’ 영상처럼 서서히 기대가 생긴다거나, 서로 웃으며 행복해하는 결말에 이르기에는 까마득해 보인다. 그래도 멀리서 내가 건넬 수 있는 만큼의 온기는 계속 보내보려 한다.
엄마에게 보낸 작은 안부가 큰 한숨과 비관으로 돌아와 지칠 때도 있지만, 한 번 배운 사랑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아이들의 스스럼없는 사랑을 온전히 되돌려줄 수 있는 것도, 어린 시절 내게 스며든 엄마의 사랑 덕분일 테니.
사랑은 빛을 향한 광합성처럼 '기울기'를 가졌다고 쓴 적이 있다. 온통 당신만을 향한 자기 연민 역시 사랑이라면, 그 기울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밖을 향할 수 있게 조용히 엄마를 불러보고 싶다. 아이에게서 건너온 온기를 쥐고, 오늘은 나도 엄마 쪽으로 기울어본다. 어슷하게 스며든 빛이 작은 틈으로 번지면, 그 안은 밖보다 조금 더 환해질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