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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틀에 앉아 세상을 쓴다

내 글에도 창을 내고 싶다

by 시루

어린 시절은 사방이 창이었다. 낮은 양옥집 마루 양쪽 끝에는 벽 대신 큰 창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길게 드리워진 커튼이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방에도 벽의 절반을 차지한 이중창이 있었는데, 안쪽과 바깥 창 사이의 널찍한 틈은 작은 비밀기지 같았다.

나는 늘 그 창틀에 걸터앉아 있곤 했다. 발을 까딱거리며 TV를 보기도 하고, 마당 너머로 이어진 귤밭과 좁은 길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고요한 시골길이었지만, 언제든 무슨 일이 시작될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돌담에 스며 있었다.


나는 들여다보는 쪽이 아니라 내다보는 쪽이었으니, 가만한 공기를 뒤섞으며 바깥세상을 보여주는 창에 오래 기대있곤 했다. 돌담 뒤에 숨은 두근거림을 상상하고, 여름밤 태풍에 휘청이는 시커먼 나무 그림자의 공포를 베개 밑에 숨기며 잠들었다. 햇볕에 바짝 마른 열기가 피어오르는 냄새, 하얗게 쌓인 눈을 누가 제일 먼저 밟을 것인가 긴장되던 아침의 입김을 창으로 감촉하며 자랐다. 큰 창이 보여주는 세상을 모두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어린 나. 창틀에 걸터앉아 바깥을 향해 거침없이 다리를 뻗어내던 시절이었다.


‘창밖에 테이블을 두겠어.’

‘작은 의자에 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며 늙어가면 어떨까.’

스무 살까지도 꿈꾸던 창문의 펄럭임은, 내다보기를 멈추고 누군가 ‘들여다볼까’ 두려운 원룸에서 완전히 끝나버렸다. 빛을 머금고 나를 스쳐 세상으로 부풀어 오르던 커튼은 사라지고 창틀 크기에 딱 맞춘 두툼한 천으로 바뀌었다. 바깥과의 더 완벽한 차단을 위해 딱딱한 블라인드로 변해갔다. 차단과 보호로 완벽을 기한 창이 뚫렸다는 험한 뉴스에 더 안전하게 막힌 창을 찾아 이사를 불사했던 시절도 지나왔다.


이제 ‘창’은 어디쯤 와 있나.

결혼 후 몇 번의 이사 끝에 지금 집을 찾았다. 환한 거실 창 너머로 마치 앞마당처럼 초록이 가득 내려다보이는 곳. 아파트 단지 입구부터 오솔길처럼 녹음이 드리워졌을 때 이미 예감했다. 여기다. 봄이면 시선 아래로 나무 끝자락이 물결친다. 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초록을 베고 눕는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마음에 창을 내며 살고 있는 나는, 다시 창틀에 걸터앉은 걸까.


새롭게 난 창은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내게 데려왔다. 그림책과 글쓰기였다. 다시 펼쳐진 초록이, 닫혔던 마음을 열어준 덕분일까. 아이들이 잠든 밤, 그림책 카페에서 우리만의 이야기들을 입혀 새로운 시선을 배웠다.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고 나누며 인생의 굴곡들을 책에 비춰 서로에게 기댄 시간. 어느새 10년째 이 창틀 위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다 보니, 우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겹이 쌓였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을 만난다. 운전이 두렵던 나를 거침없이 핸들을 잡게 한 분들. 책 이야기 안에 서로가 울고 웃었던, 기쁘고 아팠던 시간을 함께 나누었으니 각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책보다 우리의 글이 서로에게 더 깊게 스며들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글에는, 말로는 쉽게 할 수 없는 아주 작게 바스러진 자국까지 담기니까. 서로의 흉터와 어두운 자국을 모두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오히려 책은 덤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마음의 창틀에 반쯤 걸터앉아, 내 이야기를 창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뽈뽈뽈 기어다니는 글자들이 모여 커튼 자락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 창틀에 앉아 세상을 향해 몸을 기울이다가, 어느 날은 풀쩍 뛰어넘을 수도 있겠지. 쓰기를 멈추지 못하고 자꾸만 노트북을 열게 되는 이유겠다.


휘이잉- 가을을 다 쓸어버릴 듯 거센 바람이 부는 오후. 회오리바람이 단지 사이를 휘몰아 달리며 단풍나무를 흔들어댄다. 온몸으로 달려나가는 낙엽들이 계절에 박자를 맞추는 지금, 내 글에도 창을 내고 싶다. 낙엽의 진동을 문장으로,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창이 난다면 창이 보여주는 세상 너머의 리듬까지 쓸 수 있을 듯하다. 울퉁불퉁 엇박으로 발끝을 까닥이며, 창틀에 좀 더 머물다 내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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