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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닭곰탕을 끓인다

뭉근히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by 시루

따끈한 국물이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로 돌아왔을 때, 집 안에 퍼진 뭉근한 국물 냄새만큼 반가운 게 또 있을까. 미지근한 바람 사이로 찬 기운이 한 줄기만 섞여도 몸이 먼저 알아채는데, 벌써 “국물 요리!”를 외치는 아이들을 보니 성큼 겨울로 들어섰다.


간단한 꼬지 어묵탕을 시작으로 칼칼한 만두전골, 닭곰탕, 맑은 소고기 육개장까지 며칠에 한 번은 든든한 국물 한 그릇으로 저녁 식사를 한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첫째가 좋아하는 닭곰탕을 다시 끓였다.


“발끝까지 사르르 녹는데, 엄마가 안아주는 느낌이랄까.”

추운 날이면 유독 국물 요리를 찾는 이유를 물었더니, 두 눈을 감아가며 녹는 시늉까지 하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 수고로움쯤 가뿐하게 해 줘야지, 하며 냉큼 장을 봐온 나란 엄마. (큰 그림을 그렸군, 이 녀석.)


다른 계절의 가볍고 시원한 국물과 달리, 추울 때 먹고 싶어지는 국물엔 깊은 맛이 있다. 푹, 오래 끓일수록 감칠맛이 더해지는데 닭곰탕은 더더욱 정성으로 맛을 입는 요리다. 오늘은 뼈에서 살을 발라 좀 더 먹기 쉽게 만들어주기로 했으니 시간을 넉넉히 잡았다. 껍질과 뼈에서 우러난 맛이 배어 육수가 되는 동안, 옆에서 재료를 준비한다. 감자를 깎아 큼직하게 썰고 배추와 숙주나물도 넉넉히, 첫째가 요청한 팽이버섯도 씻어두었다.

큰 냄비에서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마음도 데워지는 듯,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보게 된다. 고기가 끓으며 처음 생기는 거품들을 걷어내고 어느새 뽀얗게 국물이 우러나고 있다. 투명하지 않지만 맑고 깊어진 이 탁함은 아는 사람만 알겠지. 다시 한번 작은 거품을 천천히 걷어내고 있으려니, 열린 냄비에서 퍼진 온기와 수증기 탓인지 명상하듯 가벼워진 기분이다.


번거롭지만 잘 익은 닭고기들 살을 발라 뼈를 제거한다. 튀긴 치킨이나 양념 요리는 손에 쥐고 먹는 맛이 있지만, 국물과 함께 먹을 때는 다른 재료들과 숟가락 가득 올려 한입에 먹고 싶다는 녀석을 위한 과정이다. 오늘처럼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모두 있어야 가능한 일. 흐물거리는 껍질을 걷고, 뼈 사이에 남은 미세한 살을 다듬는 동안 아이와 나눈 이야기들이 다시 스쳐 지난다. 고등학교 지원서를 쓰기 위해 고민했던 지점들, 마음은 급하고 체력은 따라 주지 않아 자꾸만 꺾이는 의지들. 아직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예비 고1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 안쓰러웠다. 이제부터는 선택 하나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책임이 뒤따르는 나이. 너의 결정을 지지하겠다는 내 말은 과연 힘이 되었을까, 그런 마음이 더욱 오늘 나를 주방 앞에 이렇게 오래 세워둔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하루에 두 번 있다. 오전에 혼자 글을 쓰러 도서관에 있을 땐 주로 나를 깊게 들여다본다. 그리고 지금, 요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다. 좋아할 만한 재료를 더 손질하고, 좋아하는 식감을 떠올리고, 더 먹기 편할 조리법을 궁리하면서.


아이의 식사를 챙기는 게 나의 사랑이겠다. 여기 서서 불을 낮추고, 지켜보다 한 번씩 저어주고, 맛이 깊어지길 기다리는 이 모습이 아이에게는 풍경이 되겠지. 끓어오르는 순간, 거품이 일어 탁해지는 순간에도 곁에 있는 풍경처럼, 이렇게 천천히 익힌 말들을 건네면 괜찮지 않을까.


뜨끈하고 깊은 맛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되었다. 한 번에 훅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엄마의 마음을 후루룩 들이마시렴. 나도 아직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삶이 이렇게 작은 결들이 쌓여 이어진다는 건 분명하니까. 닭살을 찢고 감자를 썰고, 어우러져서 우러나는 이 작은 연결들을 언젠가 너도 느끼게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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