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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Nov 23. 2017

피오르, 빙하가 할퀴고 간 자리에 만들어진 자연의 비경

안개의 땅 니플헤임의 입구 숨긴 듯 깊고 아득

북유럽 4개국(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여행을 준비하면서 송네 피오르 여행을 클라이맥스로 꼽았다. 제4기 빙하기에 융기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평원을 빙하가 쓸고 나갔다. 빙하가 할퀴고 간 땅은 U자형으로 움푹 파인 협곡을 이뤘고 그곳에 물이 차면서 204km에 걸쳐 내륙 깊이 들어온 만, 즉 피오르가 생겼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행문 <푸른 이끼와 온천이 있는 곳>에서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피오르)은 그 너른 대지와 거의 영원에 가닿을 듯한 정적과 깊은 바다 내음과 거칠 것 없는 지표면을 휩쓰는 바람과 그곳에 흐르는 독특한 시간성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묘사했다. 

송네피오르 204km 따로 오가는 페리  <사진: 송네피오르 홈페이지>

먼 옛날 빙하에 깎여나간 낭떠러지에 하얀 직선의 폭포 줄기가 떨어지고 고즈넉한 후미 곳곳에 빨간 지붕의 집이 자리한다. 빙하가 할퀸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난 암벽을 따라 푸른 이끼가 끝없이 펼쳐지고 멀고 가까운 산들이 포개져 아득해 얼음과 안개의 땅 니플헤임의 입구를 안쪽으로 숨긴듯 했다. 


바람이 구름을 밀고 가면서 생긴 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핀 조명처럼 쏟아져 산 중턱을 내리쬐고 그 밑으로 펼쳐진 언덕과 산자락에 양들이 구두점을 찍듯이 흩어져 있다. 겨울에 대비해 단단히 묶어둔 건초 다발은 경작지와 목초지 주변에 단단하게 묶어서 쌓여있다. 책과 사진으로 보았던 피오르는 자연이 만든 아름다음의 극치였다. 그 시원의 비경을 직접 보기 위해 송네 피오르로 향했다. 


뮈르달에서 플롬 가는 길에 만나 폭포

떠나기 전날 잠을 설쳤다. 피오르 행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새벽 4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알람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탓에 선잠을 들었다. 열차는 오슬로 중앙역에서 아침 6시 20분 출발한다. 숙소는 노르웨이 왕궁 옆에 있었다. 왕궁까지 걸어서 5분 거리다.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5세가 사는 왕궁은 낮은 언덕에 자리한다. 왕궁 앞에 서 있는 카를 14세 동상에서 칼요한슨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다시 오슬로에 올까 싶었다. 


칼요한슨 거리는 오슬로 최대 번화가다. 칼요한슨 거리 북동쪽 끝이 왕궁이고 남서쪽 끝이 중앙역이다. 거리를 따라 국립미술관, 대성당, 의회, 시청사 등 관광 명소가 줄지어 서 있다. 왕궁에서 중앙역까지 1.3km가량 떨어져 있다. 택시를 부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노르웨이 물가가 살인적인 탓이다. 물가는 서울의 2배 이상이다. 걸어서 칼요한슨 거리를 종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둘러 걸으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서둘러 씻은 뒤 전날 꾸린 짐을 들고 숙소 발할라를 나왔다. 속소 주인장은 북유럽 신화에 빠졌는지 방 8개와 공용 화장실 2곳, 부엌, 거실을 갖춘 민박집 이름을 발할라로 지었다. 발할라는 북유럽 신화에서 전쟁 중에 죽은 용사들이 가는 일종의 천국이다. 아무 의미 없이 죽은 이들은 죽음의 여신 헬이 통치하는 헬로 간다. 숙소의 방마다 오딘, 토르, 프레이, 발디르 등 북유럽 신의 이름을 붙였다. 나는 프레이 방에서 묵었다. 


칼요한슨 북단에서 남단에 있는 중앙역으로 여행용 카트를 끌고 걸었다. 제법 큰 자갈이 깔린 인도에 여행용 카트를 끌자니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새벽의 정적을 깨며 힘겹게 카트를 밀고 나아갔다. 거리를 따라 불 꺼진 식당, 카페, 상점, 사무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밤새 흥청망청 시달린 오슬로 최대 번화가는 인적을 찾기 힘들었다. 노르웨이 의사당 주변에서 집시가 추위에 떨며 노숙하고 있었다. 


중앙역에는 배낭여행족들이 새벽 열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고 밤새 술파티에 만취한 취객들이 벤치 곳곳을 오가며 전날의 취흥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6시쯤 도착해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커피 한잔 마신 뒤 열차에 올랐다. 잠을 설친 데다 따뜻한 커피까지 들어가니 졸음이 쏟아졌다. 마주 보는 좌석에 인도인 부부가 앉았다. 피오르 관광차 뮈르달까지 가는 커플이었다.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눈 감고 머리를 창에 기댔다. 

구름 사이 빈틈에 쏟아진 햇살이 산 중턱과 자락을 핀 조명처럼 때리고 있다.

10분가량 졸다가 인기척에 깼다. 키 175cm나 되는 큰 키의 동양인 여성이 쭈뼛거리다 영어로 물었다. 자기 스마트폰에 담긴 열차표를 보여주며 내 옆자리가 자기 자리가 맞는지 확인했다. 한국인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이민주 씨는 네덜란드 교환유학생이다. 주중엔 헤이그 대학에서 공부하고 주말마다 유럽 전역을 여행 다녔다. 이번에 송네 피오르에 가기 위해 뮈르달 행 열차에 올랐다가 나를 만났다. 민주와 나는 오슬로 - 뮈르달 - 플롬 - 베르겐으로 이어지는 피오르 일정을 함께 다니기로 했다. 

송네피오르 전경 <사진: 송네피오르 홈페이지>

민주는 열차 진행방향 오른쪽에 앉아야 비경을 만끽할 수 있다며 빈자리를 찾아다녔다. 우리는 힘겹게 예약한 좌석을 버리고 비어있는 오른쪽 좌석을 찾아 앉았다. 여행자들은 쉽게 친해진다. 낯선 곳에서 만난 인연이 심리적 자기방어기제를 느슨하게 만드는 듯하다.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는 피요르드 중간 기착지 플롬, 피요르드 페리, 베르겐까지 1박 2일 내내 붙어 다녔다. 


뮈르달에서 내려 플롬행 기차로 갈아탔다. 중간에 거대한 폭포에 내려 기념 촬영했다. 잇대어진 벼랑의 급박함에 폭포는 물보라를 만들며 굉음과 함께 쏟아져내렸다. 다급하게 굽이쳐 흐르는 강을 따라 기차는 움직였고 협곡 곳곳에 크고 작은 집들이 이어져 나타났다가 밀려 나갔다. 


피오르 관광용 열차 플롬바나가 종착지에 섰다. 페리로 갈아타기 위해 내린 마을 플롬에 도착했다. 플롬에서 맞닥뜨린 계곡과 호수에 반해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민주가 말했다. “지금까지 제 눈으로 본 자연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얼음과 안개의 땅 니플헤임으로 가는 입구인 듯 하늘을 담은 물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낭만파 화가 요한 크리스천 달은 노르웨이 산과 숲과 피오르를 다소 낭만스럽게 그렸다고 평가받는다. 아니다. 달은 노르웨이 자연 풍경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렸다. 피오르의 숲과 마을은 달이 그린 그림만큼 아름다웠다. 


산들은 포개져 깊었고 숲들은 시원의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그 사이에 닿을 데 없는 바람이 몰고 온 구름에 가린 햇살이 구름을 막 삼아 반투명하게 번지면서 천상의 비경을 연출했다. 이끼가 덮인 수직의 벼랑에는 산 정상에 내린 하얀 로프처럼 가느다란 폭포가 곳곳에서 내렸다. 


피오르 호수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기 위해 페리로 갈아탔다. 산 마루와 자락을 오가며 형성된 거대한 웅덩이에 담긴 호수는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해 하늘을 그대로 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피오르는 거대하고 깊었다. 


빙하기 만년설의 무게로 형성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중력에 이끌려 밀려 나가면서 산과 평지를 깊이 파고 깎았다. 빙하가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땅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웅덩이마다 물이 차면서 산중 호수를 만들었다. 깎인 계곡 면에 초목이 자라면서 키 작은 교목이 절벽 면을 푸르게 덮었다. 딱딱한 암석으로 된 곳은 수목이 자라지 못해 빙하에 깎인 상처가 긁힌 모습 그대로 노출되었다. 산 정상마다 파인 웅덩이엔 만년설이 쌓여 하얗게 빛났다. 

피오르 호수에 해가 지면서 하늘과 호수가 노을에 물들었다. 

구름이 잔뜩 낀 탓에 산과 호수는 무채색을 덧칠한 초록, 연두, 노랑, 주황이 섞여 다소 무겁다는 느낌을 주었다. 가끔 구름 사이로 햇살이 핀 조명을 때리 듯 특정 지역에 내리면 그곳만 연두와 노랑 색으로 빛의 세례를 받아 화사해졌다. 태양의 신 발디르가 그곳만 축복해 햇살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마저 시간이 지나면 천지 사위는 다시 무거운 무채색으로 눌렸다. 호수는 하늘의 색을 깊게 흡수해 더 어두웠다. 석양이 지면서 하늘에 노을이 번졌다. 호수는 물비늘을 만들며 출렁였다. 


하루키는 “피오르 빛깔은 날씨의 변화나 조수 간만, 해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카메라 렌즈로 도려내버리거나 과학적 색채의 조합으로 번역해버리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되리라. 그곳에 있던 마음 같은 것이 거의 사라져 버리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오래 제 눈으로 바라보고 뇌리 깊숙이 새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덧없는 기억의 서랍에 담아 직접 어딘가로 옮길 수밖에 없다”라고 감흥을 표현했다.

피요르 투어 종착지 베르겐은 노르웨이 제2의 도시다.

이번 피오르 여행에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너무 흐린 탓에 햇살에 환하게 빛나는 피오르를 보지 못했다. 산과 바다를 투명하게 반사해 하늘과 계곡으로 데칼코마니를 만드는 진경을 보지 못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 페리의 종착지 베르겐 항에 내렸다. 


베르겐은 노르웨이 제2의 도시다. 베르겐 부두 앞 수산시장은 북적였다. 배에서 내린 여행객들은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수산시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베르겐 호수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을 안주 삼아 맥주나 와인을 마셨다. 우리도 해산물 수프와 연어에 맥주를 곁들였다. 저녁식사가 늦어서인지 재료가 신선해서인지 입에 익숙지 않은 양념과 소스에 끓여 나온 해산물의 맛은 기가 막혔다. 


다음날 베르겐은 눈부신 햇살에 빛났다.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은 세공품 가게 주인이 말했다. “당신들은 운이 좋다. 베르겐이 이리 햇살에 빛나는 날은 드물다.” 베르겐 시내를 동서남북으로 오가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시내 곳곳에 자리한 공원마다 베르겐의 햇살을 만끽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곤돌라 열차를 타고 플뢰엔 산 정상에 올랐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플뢰엔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베르겐 전경은 눈부셨다. 수평선 넘어 북해가 펼쳐졌고 빨갛고 하얀 집들이 섬을 채웠다. 베르겐 항 앞바다는 햇빛을 요란하게 튕겨내며 반짝였다. 여행객들은 영상 통화로 지인들에게 베르겐 전경을 보여주느라 여기저기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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