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 넘어 대평원 가르마처럼 가르는 길 따라 걷다

[9월14일] 카미노 첫째주정리 - 카미노 베스트 3

by 이철현

카미노를 걸은 지 8일째다. 하루 기준으로 가장 멀리 걸었다. 라그로뇨부터 나헤라까지 30km 가량 걸었다. 엄지와 새끼 발가락에 물집까지 잡혔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뻑뻑해지고 있다. Puerta de Najera 알베르게에서 체크인한 뒤 샤워하고 잠깐 눈을 붙였더니 다리가 비명을 지른다. 내일도 27km 넘게 걷는다. 당초 목적지 산토 도밍고에 있는 알베르게들이 코로나 탓에 닫는 바람에 7km를 더 걸어 다음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를 예약해야 했다. 오늘 지나온 코스는 별로였다. 차로를 따라 걸어야 하고 시멘트 공장도 나오고 풍경도 특이할만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 나헤라 알베르게에 들어오니 앞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붉은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우는 풍경이 그럴싸하다.

피레네 카미노 전경 내려다보는 순례객.jpeg 카미노 순레객들은 피레네를 오르다 발 아래 풍경에 취해 멍때리기 잀쑤다.

지금까지 8 코스를 걸었다. 인상에 남는 코스는 3개다. 1위는 단연 피레네다. 해발 1200미터 산을 걸어 넘어야하니 힘들지만 정상까지 가파르게 오르는 길 따라 걷다가 잠심 숨 돌리고 발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면 기가 막히다. 순례객마다 뒤돌아 산아래 풍경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카메라를 꺼내 인증샷을 찍는다. 그냥 스마트폰 열고 대충 찍어도 그림 같은 풍경을 담을 수 있다. 정상 근처에 오르면 하늘이 가까이 다가오고 양들이 산기슭에 기대 풀을 뜯는 광경은 초현실적 풍경을 펼쳐낸다. 정상 가까이 다가서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들이친다. 정상 위에 올라 첫번째 기착지 론세스바에스를 내려다보며 가파른 언덕을 달리듯 내려왔다.

KakaoTalk_Photo_2021-09-12-07-25-02 006.jpeg 엘 페드돈 정상으로 가늘 길에 담은 저 세상 텐션의 광경

피레네가 산길이었다면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로 가는 길은 대평원이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밀밭 사이로 가르마처럼 가르는 길을 따라 걸으면 길 끝에 구름을 머리에 이은 산이 하늘에 닿아 하늘나라 성처럼 보여 초현실의 세상을 연출한다. 그 길을 나의 천사 페닐라, 북유럽 미인 레이비와 함께 걸었다. 페닐라(26세)는 덴마크에서 온 소녀다. 피레네를 내려오다 만나 줄곧 함께 걸었다. 론세스바예스 숙소에서 같은 방에서 내 앞 침대를 썼다. 차분하고 진지한게 너무 이쁜 사람이었다. 레이비(22세)는 네덜란드에서 온 미인이다. 키 180cm에 웬만한 영화배우나 모델보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둘은 산 염소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걷는다. 그냥 봐도 아름다기 그지 없는 대평원의 길을 세상 아름다운 사람들과 걷다니 스페인에서 겪는 가장 큰 호사일게다. 그리 함께 20km를 걸어 로스 아르코스에서 같은 숙소에서 묵었다.

KakaoTalk_Photo_2021-09-14-04-35-48 011.jpeg 파닐라와 네이비랑 대평원의 길을 함께 걷다.

3위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 가는 길이다. 해가 떠오르면서 추수가 끝난 밀밭을 붉게 물들이더니 구름을 이고 있는 산을 보며 걷는 발길이 행복했다. 구불구불 뻗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른 아침 구름이 농담을 달리하며 하늘에 뿌려져 극치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걸 감상할 수 있다. 구름을 이고 있는 산을 향해 걷다 정사에 오르면 발 아래 밀밭과 마을 풍경이 눈이 아릴 정도로 이쁘게 다가온다. 엘 페르돈 정상에서 바라다보이는 맞은편 산까지 밀밭과 숲, 작은 마을이 이어져 오르다 하늘을 만나 옆으로 뻗어 장관을 이룬다. 엘 페르돈 정상에는 그 유명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순례객들의 모습을 담은 철제구조물이 설치되어 순례객들의 발목을 잡는다. 순례객들은 카미노 상징 구조물 중 하나로 자리잡은 철제 조각품 앞에서 산 건너편 비현실의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제 첫주에 불과하다. 얼마나 멋진 카미노가 펼쳐질지 기대만땅이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을 가장 멋진 친구들과 가장 행복하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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