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알베르게를 나오자 가을비가 흩날렸다. 소슬비라서 젖으면 체온 유지가 힘들 듯해 우비를 위아래로 입었지만 비가 그치고 대신 땀이 차자 벗어던졌다. 왼쪽 발 물집은 밤새 치료되어 아프지 않았다. 날아가듯 걸었다. 고통없이 걸을 수 있다니 행복했다. 단숨에 7km를 걸어 그라뇬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푸드 트럭이 자리잡고 순례객들에게 아침을 팔고 있었다. 왼발 엄지 측면에 물집이 다시 생겨 바늘과 실을 꺼내 치료했다. 어제밤 프랑스인 조안나가 순례 일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복귀하면서 내게 바늘과 실을 주고 간 것이다.
미국 텍사스 걸 홈 프라이스. 이 친구 발에 생긴 물집 4개를 치료해주면서 친구가 되었다.
물집을 터뜨리고 치료하는 장면을 한참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미국 텍사스 출신 홉 프라이스다. 홉은 올해 23세로 지난 5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 스페인 도보여행을 택했다. 아만드 사이프리드와 엠마 스톤을 반씩 섞어 놓은 얼굴이라 얼핏봐도 이쁘고 귀여운 소녀다. 홉이 에바에게 물집이 너무 많아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하자 나에게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라고 말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길래 내가 안심시키고 양말 벗고 발을 보이라고 요청했다. 마을 어귀에 모인 순례객들이 신기한지 몰려들어 내가 바늘과 실로 어린 소녀의 발에 난 몰집 4개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마침 소독약도 있어서 내 손과 물집 부위, 바늘과 실을 소독한 뒤 처치했다. 처치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던 순례객들은 "닥터 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난 스페인인에서 돌팔이 의사가 되었다. 아무튼 그 뒤로 홉과 함께 걸었다.
벨로라다 산타마리아 교회. 그 옆에 있는 부속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홉은 하루 30km씩 강행군했다. 예산이 부족하다보니 25일 안에 카미노를 마치겠다고 욕심부리다 발에 물집이 잡혀 고생하고 있었다. 나는 짧게는 20km 길게는 30km 걷는게 좋다고 알려주고 다음 숙소도 출발지에서 20km 떨어진 벨로라마라고 하자 그녀도 당초 목적지를 수정해 벨로라마에 묵겠다며 나를 따라왔다. 그래서 벨로라마 산타마리아 교회가 기부제로 운영하는 부속 알베르게에 함께 묵었다. 어제밤 함께 걷던 네덜란드 순례객이 집으로 돌아가고 발에 물집이 잡혀 아파 힘들던 차에 나타난 길동무가 반가웠나보다.
산토도밍고 숙소에서 창문 넘어 찍은 산토도밍고 대성당
홉의 남자친구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친구가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한다고 한다. 카미노에서 우연히 만나 자기 물집을 치료한 이가 나다. 여러모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나는 오랜만에 미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를 만나 3시간 동안 수다를 떨며 벨로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며칠전 길이 엇갈려 헤어졌던 영국 요크셔 출신 제임스와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에바와 하이디도 함께 한다. 오늘 저녁도 예외없이 와인 파티를 가질 듯하다. 친구가 많은 건 좋은 일이나 날마다 와인이나 맥주 파티를 벌이니 크~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는 홉도 초청했다. 그녀가 나처럼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길 바란다.
나헤라에 있는 푸에르타 데 나헬라 뒤에 있는 붉은 암벽이 인상적이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수 없이 많은 마을과 도시를 지난다. 방문지마다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종탑이 높이 오른 교회보다 더 높은 건물은 없다. 교회 앞에는 광장이 자리하고 중앙 도로(calle mayor)를 따라 집들이 밀집해 줄지어 들어섰다. 어디가나 마을 구조가 비슷하다. 순례객들이 묵는 알베르게는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교회가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교회에 잇닿아 있거나 교회 부속건물에 자리한다. 순례객에게 큰 일이 숙소 에약이다. 순레자들이 많다보니 예약하지 않으면 방이나 침대를 구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탓이다. 숙소 예약에 실패하면 가능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알베르게를 찾아 빈 침대를 찾아야 한다, 알베르게마다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으로 도착하는 순레자에게 배정하는 침대를 따로 떼어놓는다.
지방자치단체나 교구가 운영하는 알베르게를 예약하기를 권한다. 숙박비도 저렴하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숙소에 묵는게 순례객으로서 의미있는 경험일게다.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순례 출발지에는 시립 쉼터(Municial Refuge)라는 불리는 알베르게에 순례객들이 많이 묵는다. 한국 순례객들에게는 생장 55번지에 있다고 '55 알베르게'라고 부른다. 그곳에서는 베테랑 직원 스페파니가 순례객들을 맞는다. 남미 원주민처럼 생긴 스테파니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첫 인상은 무뚝뚝해보이나 아주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고 친절하다.
출발지 생장에 앴는 55 알베르게. 많은 순례객들이 묵는다.
폼플라다에는 헤수스 이 마리아(예수와 마리아) 알베르게가 유명하다. 선타마이라 데 폼플라다 대성당 앞에 자리한 알베르게인데 50년 이상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이다. 바로 앞에 산타마리아 대성당이 있고 조금만 내려가면 식당과 바가 늘어선 번화가가 있다.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가면 1층과 2층을 따라 이층침대들이 줄지어 늘어서 전시 병영 같은 느낌이 든다. 1층과 2층이 터져 있어 어느 한곳에서 크게 소리 내면 알베르게 전체에 어울린다. 한번은 어떤 주제로 대화하던 순례객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자 알베르게에 있는 모든 순례객들이 웃는 일도 발생한다. 이곳은 나흘전에는 예약해야 침대를 구할 수 있다. 유서 깊은 알베르게에 묵고자 하는 순례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당일 보유 침대를 얻기 위해 오후 2시 이전 도착했으나 침대를 구하지 못했다. 이탓에 두배나 되는 숙박비를 지불하고 다시 들어가기 끔찍한 캡슐룸에서 자야 했다.
팜플로다에 있는 헤수스 이 마리아 알베르게. 유서 깊은 곳이라 예약하기 쉽지 않은 곳이나 사흘 전에는 예약하는게 좋다.
나헤라에 묵는다면 푸에르타 데 나헤라에 묵기를 권한다. 알베르게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뒷쪽에는 붉은색 암벽처럼 생긴 언덕이 멋지다. 슈퍼마켓도 걸어서 2분 거리고 교회와 광장도 지척이다. 무엇보다 알베르게 주인이 한국인 순례객을 반긴다. 거실에는 세계지도와 별도로 한국 지도가 걸려있고 한국인 순례객에게 사는 곳을 압핀으로 표시해달라고 부탁한다. 서울과 경기도에 압핀이 몰려 있는 걸 보고 왜 한국인들은 한곳에만 몰려 사냐고 물었다. 그니깐 집값도 비싼데 한국인은 왜 서울에 몰려살까.
산타 도밍고 델라 칼사다에서는 알베르게 델라 코스파라디아 델 산토에 묵었다. 유서 깊은 산타 도밍고 대성당 옆에 자리한 알베르게로 시설도 좋고 침대도 많아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다. 카미노를 함께 걸으며 만난 친구들과 한 방에 잘 수 있어 좋았다. 여러 알베르게처럼 이곳은 오후 10시 출입문을 닫는다.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에바와 조안나가 와인 2병을 가지고 와서 어제밤도 어김없이 와인 반병을 마셔야 했다. 조안나가 걷기를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와인을 기울이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만나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십년지기처럼 헤어지는게 서운하다니 카미노에서나 생기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다음 편에는 마을마다 있는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곳은 팜플러다 대성당으로 생경스러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혹시 코를 고는 사람 옆에서는 자지 못하거나 혼자 자고 싶은 이라면 사립 알베르게에 묵으면 좋다. 대신 숙박비가 비싸다. 샤워 시설과 화장실을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짐을 챙기는 순례객 탓에 새벽 잠을 방해받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설 알베르게를 권하고 싶지는 않다.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카미노가 선사하는 가장 큰 축복, 즉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