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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1일] 닿을데 없는 바람처럼 세비야 골목누비다

“마스크는 개나 줘버려” 낙태 찬성 시위대 수백명 도심 행진

by 이철현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하루만 어디 닿을데 없는 바람처럼 돌아 다니고 싶었다. 지도도 보지 않고 뒷짐지고 이름도 모르는 골목들을 걸어다녔다. 길은 좁아지고 구부러지다 광장으로 이어진다. 광장은 골목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광장 앞에는 교회, 시청, 성 같은 랜드마크들이 버티고 서서 광장의 주인이 자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베니다드 데 컨스튜시온(헌법의 거리)는 세비야를 관통하는 중앙로다. 세비야 시청에서 세비야 대성당을 지나 과달키비르 강변 쪽으로 뻗는다. 도로 중앙에는 트램이 오가고 자전거 도로, 인도가 겹쳐 혼잡하다. 트램 속도가 빠르지 않아 교통 사고가 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KakaoTalk_Photo_2021-10-22-01-31-15 001.jpeg 낙태처벌 반대 시위대가 도심 중앙을 행진하고 있다. 대다수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론다 행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프라도 데 산 세바스티안 버스정류장까지 걷다가 돌아오다가 엄청난 북소리를 앞세운 시위대들을 만났다. 헌법의 거리 끝 분수대에서 모인 시위대는 도심 가운데를 무리지어 행진했다. 앞에서 타악기, 특히 북 위주로 꾸려진 수십명 무리를 앞세우고 시위대 수백명이 플랜카드를 들고 따라왔다. 플랜카드를 읽어보니 “낙태 처벌은 성차별적인 폭력이다.” “침묵은 공모를 낳는다.” 같은 내용이었다. 여성 인권 시위였던거다. 그런데 태반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열명 중 하나 썼을까. 스페인 백신접종률이 80%를 넘어서서 그런가. 스페인에서 위드 코로나는 시작된 듯하다.

KakaoTalk_Photo_2021-10-22-01-32-31 004.jpeg 세비야 시청 뒤 산 프란치스코 광장.

세비야 두번째 - 세비야 알카사르, 이슬람과 카톨릭 건축 양식의 빛나는 앙상블

세비야 알카사르 관련 역사와 배경 지식을 알고 싶으면 유튜브를 검색해봐라. 전문가들이 기가 막히게 정리했다. 그들보다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다만 내가 보고 느낀 건 오롯이 내꺼다. 알카사르 방문하면서 받은 정서적 충격 위주로 정리하겠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나무 가지, 아랍 문자, 기하학적 도형으로 만든 문양이 그리 아름다울 수 있다니 헐~ 스페인 교회의 테마는 성상과 십자가다. 예수님이나 성모마리아 같은 신급 레벨이나 천사, 열두 제자, 성인, 교황, 주교처럼 그 아래 서열의 인물들을 그리거나 조각해 성당 안팎을 치장한다. 반면 이슬람 모스크는 인물이나 동물처럼 형상을 갖춘 모양은 우상숭배로 치부해 금지한다. 그러다보니 식물, 문자, 도형을 이용한 문양이나 도안이 발달한 것이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돌에 새긴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나무에 깎아도 이리 세밀하지 못할게다.

KakaoTalk_Photo_2021-10-22-01-33-48 005.jpeg 알카사르 정원은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기 그지 없다.

아라베스크 문양은 이슬람 예술양식의 극치다. 가톨릭 세력이 알카사르를 점령한 뒤에도 아라베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양식을 보존했다. 타 종교에 배타적이고 잔인했던 페드로1세마저 이슬람 건축양식을 살려 알카사르를 재건축하라했다. 예술적 감성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군주였나보다. 뭐 사람 잡아서 죽이는건 선수였다고 하던데. 그리 사람을 죽이니 어머니나 자식도 믿지 못해 유사시 혼자서 도망갈 수 있는 출입구를 알카사르 출입구 옆에 별도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참 힘들게 살았다.

KakaoTalk_Photo_2021-10-22-01-33-50 006.jpeg 오렌지 나무, 장미 나무, 야자수 같은 멋진 나무들이 정원을 꾸미고 있다.

아라베스크 못지않게 눈에 띄는 건 물을 이용한 인테리어다. 바닥에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를 두고 이내 연못이나 인공수로로 이어지는 물길을 만든 것이 멋졌다. 이슬람 무어인이 사막 출신이다보니 물을 중시했고 건물 안에서도 물길의 흐름을 인테리어로 활용했다. 또 햇빛이 뜨거운 안달루시아 지방 기후를 감안해 이 물길은 건물 내 온도를 유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고 한다. 미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이슬람 세력은 가톨릭 세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스페인이 유럽 국가 중 수학에 가장 탁월했던 건 이슬람 영향 덕이었다. 이슬람 왕조의 첫 수도였던 코르도바에는 장서 40만~100만 권을 소장한 도서관을 지은 이는 이슬람인이었다. 그만큼 이슬람 무어인의 품격은 미개한 서고트족과 클래스가 달랐다. 그 차이를 알카사르는 그대로 보여준다.

KakaoTalk_Photo_2021-10-22-01-33-56 009.jpeg 아치 위를 꾸민 아라베스크 무늬가 나무에 새긴양 섬세하다.

내 글솜씨로는 알카사르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다. 세비야에 오면 꼭 보길 바란다. 궁전 내 정원을 한참 돌아다니는 것도 잊지마라.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알카사르 정원과 비교하면 잽도 안된다. 베르사이유 정원은 나무를 인위적으로 깎고 잘라 인간 취향에 맞게 기형아처럼 변형시켰다면 알카사르 정원의 오렌지 나무, 장미 나무, 야자수는 제멋대로 자라면서도 그늘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 길이 만들어지고 길이 교차하는 곳마다 어김없이 분수가 놓였다. 물론 일부 나무들은 모양을 만드려고 잘라 배치한 것도 있다. 그게 유일하게 못마땅했다. 유럽 궁전의 정원처럼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물과 나무와 꽃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 길이 뻗고 물이 솟는 정원에서 2시간 동안 헤매고 다녔다. 시인의 정원 구석에서 누워 자다가 모기의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긴 바지와 긴 소매 옷을 입기를 권한다.

KakaoTalk_Photo_2021-10-22-01-33-51 007.jpeg 왕궁 지하에 설치한 왕비 전용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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