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시간 무수면 비행에 이어 상파울루 2만5천보 대장정

파울리스타, 우스카 프레리, 메르카도 두 무니시팔, 지옥철까지 도보 여행

by 이철현

3월 15일 오전 9시 40분 인천국제공항 1번 터미널에서 뉴욕행 아시아나항공(OZ222)을 탔다. 22리터 등산가방에 옷가지, 세면용품, 구급약품, 전자책, 노트북을 차곡차곡 때려 넣었다. 이과수 폭포와 이파네마 해변에서 물놀이할 때 갖고 다닐 방수가방도 챙겼다. 위탁 수하물은 없다. 1년 6개월 전 이베리아반도에서 100일간 여행할 때도 이 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여행 다닐 때 짐이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없으면 죽는 것 빼고 다 버리고 왔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15시간을 날아 같은 날 오전 10시 40분 미국 뉴욕 JFK 공항 1번 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과 뉴욕 간 시차는 14시간이다.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전자책 단말기 크레마에 담았다. 평소 읽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읽기를 차일피일 늦추던 책들이다. 홍진채 저 <거인의 어깨 2: 치밀한 전략가 필립 피셔에게 배우다>,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 빌 설리번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수 프리도 <니체의 삶: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진정한 삶>, 최준철 저 <한국형 가치투자>, 제임스 몬티어 <투자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중남미 7개국 여행지와 미국 소도시에 있는 카페에서 읽을 거다.

상파울루에서 9년 거주한 한국어 강사 송하승과 함게 파우리스타 전망대에서

뉴욕 JFK공항 행 비행기에서 홍진채 저 <거인의 어깨 2>을 읽었다. 실망스러웠다. 투자원론서에 불과한 책을 읽자니 따분하고 지루했다. 한국 가치투자계의 천재라고 불리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졸저였다. 보다 지겨워 이내 덮고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을 열었다. 두 번째 읽는 거다. <거인의 어깨>보다 훨씬 낫다. 투자 칼럼리스트답게 글쓰기 능력에서 홍진채를 압도했다. 미래현금흐름의 현재가치 할인 같은 파이낸스 원론 수준의 기초 개념이나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투자 심리에 기초한 통찰력을 담아 내용이 충실하다. 오프라인으로 저장한 유튜브 스페인어 인강도 들었다. 햇수로 2년가량 꾸준히 듣다 보니 스페인어 실력이 중급까지 올라왔다. 속 깊은 얘기야 힘들겠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통은 가능한 수준이다. 어학이야 꾸준히 반복하면 된다. 나 같은 학습 지진아도 되더라.


뉴욕 JFK 공항에 오전 10시 30분 떨어졌다. 공항 내에서 오후 6시 30분까지 버텨야 한다. 맨해튼까지 다녀올 수 있겠지만 무리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1번 터미널에 있는 한식 코너 직지 옆에 자리 잡고 휴대전화 충전도 하고 칠면조 샐러드 랩을 먹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더디 가는 시간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시작했다. 뉴욕 JFK공항 4번 터미널에서 오후 6시 45분 라탐항공(LA8181)을 타고 3월 16일(목) 오전 5시 20분 Sao Paulo Guarulhos Aeroporto(GRU) 3번 터미널에 도착했다.

상파울루 다운타운 파울리스타 거리

뉴욕에서 상파울루까지는 비행 편으로 9시간 30분가량 걸렸다. 위탁수하물이 없다 보니 빠르게 입국 수속을 마치고 세관을 지나쳐 출구 쪽으로 나가는데 브라질 경찰이 나를 꼭 찍어 수하물 검사를 다시 받게 했다. 내 인상이 불순해 보이기는 브라질 경찰 눈에도 마찬가지 나보다. 세관 엑스레이 검사장비로 꼼꼼히 살피더니 가라는 말도 없이 방치하길래 “검사 마쳤냐? 그럼 나 짐 챙겨 나가도 되냐?”라고 스페인어로 물었더니 알아듣고 가란다. 포르투갈 인에게 스페인어는 우리로 치면 대충 제주도 사투리쯤 생각해도 된다. 대충 알아듣는다고 한다.


과률루스 공항에서 우버를 타고 송하승과 만나기로 약속한 빵집으로 갔다. 쎄 성당 뒤쪽에 있는 브라질 빵집으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우버를 타고 쎄 성당 앞을 지났다. 쎄 성당은 노숙자와 부랑자 집단촌으로 전락했다. 상파울루에서 유서 깊은 곳인 쎄 성당에 혼자 가는 관광객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3015년에는 쎄 성당 앞에서 권총으로 무장한 강도가 인질극을 벌여 두 사람이 죽는 충격적인 장면이 생중계되기도 했다. 어설프게 강도를 제압하려한 한 노숙자는 총에 맞고 쓰러지고 그 사이 인질이 탈출하자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강도를 현장 사살했다. 관광객에게는 버거운 잔혹사로 가득한 곳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쎄 성당에서 사진 찍다가는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바로 갈취당하기 십상이란다.

상파울로 최대 서점 아늑하고 잘 꾸며진 곳이었다

오전 7시 빵집에 도착해 플라스틱 입장권을 뽑고 구석에 자리 잡았다. 송하승 씨가 늦잠 자는 바람에 늦는다고 해서 세프 격인 친구에게 추천받은 마늘 빵과 커피 콘 레체(우유 넣은 커피)를 마셨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아시아인이 신기한지 오렌지 주스 짜는 직원은 곁눈질로 나를 보며 연신 실실거리며 웃었다. 약속 시간보다 30여분 늦어 하승 씨가 부리나케 가게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승과는 이날 처음 본다. 남미사랑 단톡방에서 연락을 주고받아 낯선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일면식 없는 한국 청년이었다.


하승은 상파울루에 9년가량 거주한 한국어 강사다. 한국에서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다 답답함을 느끼던 터에 브라질에 사는 지인 초대로 상파울루에 왔다가 눌러앉았다. 브라질 연인과 함께 살고 있고 줌으로 브라질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산다. 브라질인과 결혼해 영주권을 얻었고 포르투갈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본인 성격이 극단적인 외향인이라 소개한다. 함께 길을 걷다 보면 혼자 있는 브라질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쉽게 건넨다. 엄청난 사교성이다. 수백명의 브라질 여인들과 사랑을 나눴다고 한다. 지금은 포르투갈인처럼 생긴 9살 연하 여인에 충실하다. 하승 씨 연인은 심리상담사를 하는 마음씨 순한 상파울루 사람이란다.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보여주는 사진으로 얼핏 봐도 기품 있는 미인이었다.

우스타 프레이 거리에서 마신 사약 같은 에스프레스 더블샷. 탄산수와 함께 마시는게 특이했다.

한국인이라기보다 한국어와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브라질인에 가까운 하승씨와 초인적인 행군을 시작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상파울루 숙소까지 들어와 뻗을 때까지 50시간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오는 기내에서는 한두 시간 졸다 깨다 했고 JFK공항에서는 마땅히 잠잘만한 곳이 없어 뜬 눈으로 견뎠다. 다행히 뉴욕에서 상파울루로 오는 기내에서 옆좌석들이 비어 있는 덕분에 옆으로 누워 2~3시간 간격으로 자다 깨다 하며 왔다. 하승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일본인 거지구역 리베르다지 거리에 있는 자기 숙소로 데리고 갔다. 한국에서 예약한 숙소는 오후 2시부터 체크인하고 하승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상파울루에서는 신용카드, 여권, 카메카 같은 귀중품을 갖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길거리에서는 휴대전화를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한다. 오토바이나 자전거 타고 채가거나 강도 같은 강력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 하루 사용할 현금만 들고 비치웨어와 슬리퍼 신고 나왔다. 강도 눈에 보기에 뺏어갈 만한 게 없을 아시안인으로 보이기를 바라며 초라한 행색을 갖췄다. 리베르다지 숙소에서 걸어 파울리스타 거리(번화가)를 관통한 뒤 도심 공원을 지나 우스카 프레이레 가(가로수길)로 넘어갔다가 메르카드 두 뮤니시팔(중앙시장)에 들른 뒤 비즈니스 중심지(테헤란로)에 자리한 한국 식당 미림까지 주파했다. 총 2만5천 보를 걸었다. 50시간 이상 제대로 잠을 못 자고 강행군했으니 미림에서는 머리 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신라면 한 그릇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뻗었다. 실신에 가까운 잠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푹잤다.

상파울루 랜드마크 PASP 미술관. 외관은 저래도 피카소 같은 대가의 작품들 다수 전시

파울리스타 거리는 상파울루 중심을 가로질러 4km가량 곧게 뻗은 번화가다. 한국 영사관부터 일본 문화관, 방송사, 신문사, 대학교까지 밀집한 상업 문화 중심지다. 이곳을 거지 행색 차림인 한국인 2명이 슬리퍼 끌고 걸어 다녔다. 한국 문화원 건물은 단전 탓에 잠시 문을 닫아 문 앞에서 발을 돌려야 했다. 파울리스타 거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르기도 했다. 혼자 갔다가는 예약하지 못해 대기하다 포기해야 했겠으나 하승이 수완 좋게 두 사람이 올라갈 표를 구했다. 하승은 사막 가운데 혼자 떨어뜨려도 원주민 부족과 친해져 행복하게 살아갈 사람이다. 친화력, 수완, 소통 능력이 극치에 이른 걸물이다.


절대 외향성의 인물과 파울리스카 곳곳을 기웃거리다 파울리스타 거리와 우스카 프레리 거리를 잇는 도심 공원을 가로질렀다. 우스카 프레리 거리는 꾀죄죄한 리베르다지와 달리 집들이 깨끗하고 세련됐다. 길가에 늘어선 부띠끄 샵도 멋지고 길가에 자리한 카페들은 근사했다. 우리네 가로수길이 연상되는 곳이다. 산토 그랑(Santo Grão) 커피전문점에서 사약에 가까운 진한 커피를 더블로 마셨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주문한 커피지만 그 깊이와 풍부한 맛에 홀딱 빠져버렸다. 여기가 유명한 곳인 이유가 있었다. 커피 전문점 너머에는 4~5층 스튜디오처럼 생긴 작은 부띠끄 호텔이 보였다. 유명 연예인이 상파울루에 오면 묵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파울리스타 쪽으로 이동했다. 상파울루 현지 뷔페식당 Manai Gastronomia에 가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상파울루 음식의 향연을 즐겼다. 2만 원가량 비용으로 온갖 열대과일 음료를 곁들인 신라호텔 뷔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안심 등심 닭고기 스테이크에다 온갖 야채 과일 콩류 요리를 먹고 야자수 열매에 빨대 꽂아 갖다주고 수박 망고 파파야 같은 열대 과일 주스를 무한 주문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맛있어 배 터지게 먹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상파울루에서 첫끼를 100년 된 빵집에서 먹었다.

끝도 없는 장정은 이어졌다. 루스라는 부랑자 점거지역을 우버를 타고 부리나케 가로질러 메르카도 두 뮤니시펄에 갔다. 오후 5시 넘어 도착해서인지 파장 분위기였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체력이 한계에 닿은 것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하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퇴근길 지하철로 안내했다. 퇴근 시간 상파울루 지하철은 혼자라면 가지 말 것을 권고한다. 밀집대형으로 몰려가는 이용객들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고 열차 객실 안에서는 사람 속에 갇혀 꼼짝달싹 못한다. 특히 1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시외곽으로 빠지는 무리에 휩쓸리면 자칫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 <월드워 Z>에나 봄직한 폭주하는 좀비들 사이에 끼이는 꼴이 된다. 갈아타는 동선도 미로와 같아 나침반 같은 방향감각을 가진 이도 길을 잃고 인파 속에 갇힐 거다.


지하철역을 나와 고층건물 밀집한 거리를 한참 걸어 한식당 미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폭탄주 마시고 집에 가서 뻗고 싶었다. 서둘러 소주를 시키려 하자 하승은 25세 한국인 여성 관광객과 선약이 있었다고 숙소까지 가서 그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더라. 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속으로 진짜 오지 말았으면 바라고 그 친구를 보냈다. 퇴근길 교통 체증이 살렸다. 막히는 길로 돌아오는 걸 포기하고 하승과 25세 여인은 한국인 거리 봉헤찌로로 방향을 틀었다고 톡이 왔다. 하승의 마음이 바뀔까 봐 우버를 서둘러 불러 식당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차 안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휴대폰 버튼을 잘못 눌러 우버를 취소했다. 포르투갈로 뭐라고 떠드는 드라이버 탓에 하승과 전화했다. 하승 통역 덕분에 10 헤알로 양해를 구하고 내려 어둠깜깜한 길에서 우버를 다시 불러야 했다. 상파울루에서 혼자 어두운 골목에서 오후 8시 넘어 길거리에 서 있는 아시안이라니. 죽으려고 환장한 거다. 다행히 슬리퍼에 촌스러운 빨간 비치웨어 반바지, 머리는 길러 치렁치렁 산발인 데다 연갈색으로 염색한 덕분인지 무사히 우버를 타고 숙소에 돌아왔다. 살아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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