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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Apr 05. 2023

중남미 여행 첫 번째이자 최고의 행운과 헤어질 결심

4월 3일(월) 피츠로이 등반 마치고 토레스델파이네 W 코스 도전

헤어질 결심을 했다. 곧 닥칠 일이라 예상했지만 외면하고 차일피일 미뤘다. 소담과 나래는 중남미 여행의 첫 번째 행운이다. 함께 하는 내내 즐거웠고 유쾌했다. 여행 일정을 결정하고 숙소, 투어 예약 같은 일을 분담할 수 있어 스트레스도 줄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함께 커피나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소중했고 같은 투어에 참여하면서 멋진 곳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이과수폭포 숙소에서는 그릴로 아사도를 요리했고 엘칼라파테에서는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천국으로 가는 길 같은 곳을 이들과 함께 걷고 있다니 행복했다. 따라서 이들과 헤어지는 건 힘겨운 결심을 요했다. 

모레노 빙하 가는 길 도로에서 한컷

낯설고 멋진 곳을 보는 것 못지않게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과 만나고 사귀는 것이 여행의 묘미다. 소담, 나래와 동행을 이어가면 제2의 소담이나 나래를 만날 수 없을게다. 소담과 나래도 나이 많은 아저씨보다 또래 여행자들과 만나는 게 좋을 듯했다. 엘찰텐에서 마지막날 또래 친구들과 밤늦게 술 마시며 즐겁게 대화하는 둘을 보니 헤어질 결심한 게 잘한 짓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 자리에 끼워 들어가 작별 인사했다. 

해뜰무렵 피츠로이는 빨갛게 불타오른다. 

먼저 정 떼기에 들어갔다. 말을 줄였다. 만나는 시간을 크게 줄였다. 단톡방에서도 나왔다. 갑자기 저 아저씨가 왜 저러나 싶을 거다. 마침 토레스델파이네 W트레킹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수개월 전 예약하지 않으면 참여하기 힘든 트레킹 프로그램이지만 윤성 동행자가 예약을 양도해줬다. 소담과 나래는 토레스델파이네 등반을 포기했다. 피츠로이 등반에 질려서 당분간 산은 보기 싫은가 보다. 혼자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떠나야 했다. 바릴로체, 살타, 우유니, 마추픽추 등지에서 만날 수 있겠지만 가능한 피하려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하루 숙소를 함께 썼던 윤성을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피츠로이 등반을 함께 한 동지들

소담은 범접하기 쉽지 않은 기품을 갖춘 미인이다. 특유의 밝은 기운이 사람을 끌지만 마냥 친해지기 쉽지 않다. 판단이 정확하고 문제 해결 방법도 깔끔하다. 한마디로 똘똘하다. 버티는 힘도 만만치 않다. 새벽에 차 타고 3시간을 달려 잠도 자지 못한 채 피츠로이 정상에 올랐다. 피츠로이 구간은, 특히 정상까지 1km 구간은 등산 초보자에게는 오르기 힘든 난코스다. 소담은 폴 하나에 의존해 제시간에 올랐다. 놀라운 건 그전에 단 한 번도 등산 경험이 없었다. 힘들어했지만 끝내 지친 몸을 이끌어 피츠로이 정상이 일출에 불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에 닿은 것이다. 이런 여행 친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루타40 도로에서 바라본 피츠로이

나래는 중남미에서 입양한 딸이다. 하루 세 번 이상 빵 터지게 한다. 피츠로이 등반 중 길을 잃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는 잘생긴 중국인 궈에게 한눈에 반해 선두에 선 궈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국어와 브로큰 영어로 소통하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등반 준비에 서툰 이에게 발목보호대를 채워주면서 “아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네"라고 말해 배꼽을 잡았다. 버스표를 사기 위해 터미널에 가서도 여기저기 매표소로 나를 이끌며 단어 위주의 영어로 표를 사주기도 했다. 나래는 감정 표현이 명확하고 거침이 없다. 내가 MZ의 전형을 좋아할 줄이야. 나래와 함께 다니면 일상이 즐겁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다보니 나래 동갑내기 규진이 친구에게 “Sean(내 영어 이름)이 나래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다. 절대 오해 금물. 이 나이까지 먹으면 사심 없이 사람이 그냥 좋을 수 있다. 이 친구가 동의하면 미국 횡단 여행에 데려가고 싶다. 마침 이슬기 변호사가 뒤늦게 미국 횡단을 결심하면서 여성 여행자가 한 명 더 있는 게 좋다. 진지하게 미국 동행을 제안했더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소담과 나래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 

나중에 피츠로이를 되새길 때마다 소담과 나래를 떠오를 게다. 잇대어 솟은 삼각형 산봉우리 세 개에 스크린에 빛을 영사하듯 햇빛이 닿으면서 산이 빨갛게 불타오른다. 시각이 지나면서 빨강이 주홍, 주황, 금색으로 바뀌면서 경탄을 자아내는 광경을 연출한다. 내 생애 가장 멋진 일출이다. 아니 가장 멋진 햇빛의 작품이었다. 그 산을 배경으로 함께 등반한 여행자들이 줄줄이 섰다. 하나하나 경탄의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경탄을 공유하면서 따로 또 같이 피츠로이 등반의 추억을 음미하고 공유했다. 

뒤늦게 함류한 규진 덕분에 중남미 여행 1막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엘찰텐에서 엘칼라파테로 돌아가는 루타 40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다. 돌아가는 길에서 뒤돌아보면 구름을 머리에 이은 피츠로이가 멀리 보이고 그쪽으로 항해 단 하나의 도로가 뻗어나가는 모습은 생경할 만큼 비현실적이다. 차를 달리다 과나코와 타조 같은 동물이 달려 나가고 멀리 에멜라드 빛을 가득 담은 호수가 설산과 대조를 이루며 친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지구가 이리 아름다움 행성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늘 유쾌한 나래와 헤어지는게 가장 아시웠다. 

정 떼기가 마무리되어 쉽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자만했다. 경비 정산하느라 나래와 대화하다 “그러면 나 서운해요"라는 말이 결심의 벽이 타격을 줬다. 소담이 보낸 장문의 메시지에 결심의 벽은 반파당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숙소 식당에 앉아있는 사이 규진과 소담이 찾아왔다. 내 눈치 보느라 조심하던 기색은 없어졌다. 결국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럼에도 짐을 들고 터미널 향해 걸었다. 규진과 준수가 함께 터미널까지 동행했다. 이렇게 중남미 여행의 1장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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