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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Apr 09. 2023

W트레킹 첫날... 그레이빙하 유빙 맛보다

4월6일(목) 첫날 35km 강행군... 버스 고장으로 거리 늘어

여행 내내 내가 가는 곳마다 날씨가 좋아 ‘날요(날씨요정)’이라는 애칭까지 얻었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날요라는 징크스가 힘을 발휘했는지 날이 너무 맑았다. 비 오고 강풍이 분다는 예보가 헛소리가 되었다. 역시 날요라는 칭찬까지 들으며 그레이빙하에 오르기 시작했다. 빙하까지는 가지 말고 중간 전망대까지 오른 뒤돌아서 다음 숙박지로 출발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것만 해도 25km가 넘는 거리다. 윤성이 빙하까지 갈 수 있다고 고집했다. 그레이빙하까지 닿으면 하루 총 35km가량 걸어야 한다. 마음이 급해졌다. 

첫날 목적지 그레이빙하에 닿았다.

가장 느린 니니를 선두에 세우고 재민 윤성이 뒤를 따랐다. 이스라엘 청년이 똥 닦은 휴지를 태우다 파타고니아 산림을 홀랑 태워먹은 적이 있었다. 그 탓인지 여기저기 불타 죽은 고사목들이 눈에 띄었다. 그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빙하물이 내려 만들어진 담청색 호수가 바람결에 출렁이고 그 너머로 눈으로 머리를 곱게 치장한 산들이 잇대어 따라온다. 담청색 호수 위에서 빙하에서 떨어져 흐르는 짙은 푸른색 빙하를 볼 수 있다. 하늘에는 햇빛이 쨍하고 호수 위에는 빙하라. 숲 속 길에는 키 낮은 관목이 키 낮은 숲을 이루고 그 사이를 흐르는 냇물은 바닥을 다 드러낼 정도로 맑다. 갈증이 날 때마다 손으로 떠 마시면 몸이 자연에 정화되는 느낌이다. 폐 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공기는 신선하고 달았다. 신이 인적이 드문 파타고니아 어디에 천국의 입구를 숨겨 두고 그 앞을 멋지게 꾸며 놓은 것 같은 풍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레이빙하 가는 곳은 절경 일색이다. 

재민이 니니를 챙기며 뒤처지는 사이 윤성과 나는 달리다시피 치고 올라갔다. 윤성은 신발이 맞지 않아 아킬레스건 쪽 통증이 상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윤성이 고통으로 처지면 내가 앞장서서 끌었다. 내리막에서는 달리듯 내려갔고 오래막에서는 미끄러지 않게 베이비스텝으로 딛고 올랐다. 앞서 가던 유럽인이나 중남미인들을 젖혔다. 쉬지 않고 4시가량 오르다 보니 니니와 재민은 이제 그만 가겠다며 먼저 돌아섰다. 윤성과 나는 빙하 앞 산장을 지나쳐 더 내달렸다. 니니 재민과 헤어지고 200m가량 갔더니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들이 모여있는 곳에 닿았다. 아무도 없었다. 윤성과 나는 미쳐 날뛰었다. 하트 모양 빙하 조각을 들고 사진도 찍고 빙하 조각을 떼어 입에 넣었다. 한참 호숫가까지 떠내려온 빙하를 감상하다가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빙하에서 떠내려온 유빙이 호숫가에 닿는다. 

올라오는 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 그날까지 본 자연경관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눈에 담고 입으로 경탄의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내 발로 밟고 내려왔다. 이걸 보지 못하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거라는 메시지를 여사친 성희에게 톡으로 보냈다. 바로 니니와 재민을 따라잡았다. 곧이어 페리 선착장에서 친해진 다른 한국인 여행자 성민과 민홍을 만났다. 이들은 빙하 앞 산장을 예약했다. 반갑게 인사하고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돌아섰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파이네 그란데에서 짐 챙겨 서둘러 다음 숙박지인 프란세스 캠핑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급히 늦은 점심을 해서 먹고 길을 나섰다. 극지방에 가까워서인지 다행히 늦게까지 밝았다. 3시간가량 사투를 벌이며 산장에 도착했다. 

호숫가에 닿은 유빙의 맛을 보았다. 

프랑세스 산장은 열악했다. 취사 공간도 비좁고 춥다 보니 씻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로지와 캠핑장 사이도 많이 떨어졌다. 니니가 묵는 도모(돔 모양의 산장 숙소)까지 가서 샤워하고 돌아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강풍이 불면서 기온이 급하게 떨어졌다. 윤성이 개인 텐트를 치려 했다. 재민과 나는 기설치된 텐트를 예약해 잘만했다. 비가 많이 내리자 윤성이 개인 텐트 치는 걸 포기하고 우리 침대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도모에서 혼자 불멍을 때라다가 텐트에 돌아왔더니 재민과 윤성이 자고 있었다. 가운데 자리에 침낭을 펴서 있으니 내 자리로 남겨 놓은 듯했다. 당초 2인용 텐트인 데다 재민의 덩치가 어마어마하고 윤성의 어깨도 장난이 아닌 터라 비좁은 곳에 파고 들어가 누우니 양쪽에서 압박했다. 밤새 비가 와 텐트 가에 물이 새 들어왔다. 재민과 윤성이 본능적으로 비를 피해 안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내가 중간에 꽉 끼는 꼴이 되었다. 잠을 못 잤다. 큰일이었다. 잠을 못 잔 채 비가 오고 강품이 부는 최장의 코스를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 

파타고니아는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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