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철현 Apr 09. 2023

살인적인강풍 뚫고 칠레노 도착...목숨 건 트레킹 코스

4월7일(금) 최악의 악조건에서 살아남아 중간 목적지 도착

20대 청년 둘 사이에 끼어서 칼잠을 자다 보니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윤성은 하루 더 묵더라도 프란세스와 브리타니오 전망대까지 보고 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전날에는 나도 함께 하려 했으나 아침 몸 상태를 보니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다른 일행이 전망대 포기하고 바로 칠레노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나까지 칠레노 직행에 합류하니 윤성도 마지못해 W코스에서 가운데 튀어나온 부분 일부를 포기하고 칠레노로 이동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윤성의 컨디션이 갈수록 나빠졌다. 여행 초기 신발을 포함해 속옷까지 모두 도난당하는 바람에 싼 값에 트레킹화를 사야 했다. 이 트레킹화가 문제를 일으켰다. 발뒤축이 튀어나와 아킬레스건을 지속적으로 쓸다 보니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또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에서 서핑을 배우다가 무릎을 다친 탓에 내리막에서 고생해야 했다. 이쯤이면 트레킹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윤성은 진통제까지 먹으며 일정대로 걸었다. 우리 일행 중 가장 앞서 걸었고 개인 텐트를 갖고 다니느라 짐이 가장 무거웠다. 감탄을 자아낼만한 근성이었다. 이 친구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는 박서준과 주지훈을 섞어놓은 듯한 미남이다. 아프리카부터 중남미까지 장기 여행하며 극한의 여행 조건을 감내하며 자기 한계를 실험하고 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ㅎㅎ

컨디션도 갈수록 나빠졌다. 일행과 떨어져 먼저 치고 나갔다. 일행과 보조를 맞추자니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고 내 등산 리듬이 깨졌다. 일단 내 몸을 챙겨야 일행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말도 최대한 아꼈다. 조금이라도 쉬려고 앉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이대로 잠들다가는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 있겠구나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일어났다. 비상식량으로 에너지를 유지하며 묵묵히 걸었다. 왼쪽으로는 눈을 머리에 쓰고 있는 설산이 거인의 걸음으로 옆에서 쫓아왔고 오른쪽으로 담청색 호수가 끝도 없이 출렁거리며 이어졌다. 비가 오락가락했다. 침낭이 젖기 시작했다. 강풍이 돌발적으로 불면서 몸을 날렸다. 흩어진 균형을 잡으며 다시 걸었다.

칠레노 산장에 가려면 바람의 평원을 지난다. 바람이 거세 몸을 가누기 쉽지 않았다.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산허리를 감고 돌아나가야 하는데 그 정상에 올라서니 한발 내딛기도 힘든 바람이 정상 가까이에 오른 여행객들을 꼼짝 못 하게 있었다. 자칫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을 듯해 암벽에 붙어 몸을 낮췄다. 나와 비슷한 모양으로 여기저기서 여행객들이 누워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일 예정되어 있던 토레스델파이네 1일 투어는 강풍 탓에 모두 취소되었다고 한다. 5분가량 바닥이 붙어있어도 바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바이킹이 나타났다. 덩치가 크고 뼈가 억센 북유럽인 하나가 내 몸을 붙잡고 강풍 구간을 정면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정면으로 오는 바람을 허벅지 힘으로 버티고 머리를 45도 전망으로 기울여 나를 끌고 앞으로 나갔다. 나는 바이킹 몸에 감싸 무게를 늘려 바람에 몸이 날리는 것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 생애 처음으로 내 몸을 누군가에 맡겼다. 평소 3시간 이상 근력과 유산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힘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토델파 강풍에게는 어이없이 내팽겨졌다.

바람이 덜 부는 곳에 나를 내려놓은 뒤 바이킹은 다시 바람 속으로 치고 들어갔다. 초인이 따로 없었다. 이 녀석을 다음날 토델파 일출을 보고 내려오다가 다시 만났다. 먼저 나를 아는 척했다. 고맙고 반가운 나머지 이 녀석을 끌어 앉았다. 대화 하나 나눈 적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간에도 3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충실하고 간절한 감정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후 5시쯤 칠레노 산장에 간신히 도착했다. 따뜻한 물에 커피를 타서 마셨다. 평소 설탕을 넣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설탕을 듬뿍 타서 마셨다. 뒤에 올 일행을 위해 커피를 타서 보온병에 넣었다. 알고 하니 그 커피를 무료가 아니고 3천 페소나 내야 했다. 그냥 무시했다. 이곳에서는 화장실 쓰려면 1천 페소를 내라고 적혀이다. 이 또한 무시했다. 한참 기다리니 윤성 재민 니니 순으로 칠레노 산장으로 들어왔다.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윤성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에 니니를 재민에게 맡기고 혼자 움직였다고 한다. 재민이 니니를 내내 챙겼다. 우리 중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전투식량으로 저녁을 때운 뒤 몸을 말리자마자 침낭에 들어갔다. 일단 잠을 자야 했다. 오후 8시부터 누웠다. 뜨거운 물을 담은 등산용 물병을 침낭 안에 넣고 잤다. 텐트를 함께 쓰는 재민이 워낙 잠버릇이 좋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토델파 삼봉에 올라야 한다. 삼봉 벽에 펼쳐질 일출의 장면을 보는 것이 W트레킹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를 놓칠 수는 없다.


작가의 이전글 W트레킹 첫날... 그레이빙하 유빙 맛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